♣ 산마을 詩情 산책/미발표 신작 詩 161

들바람이 좋은 날

들바람이 좋은 날 들바람이 좋은 날 요즘은 산들바람이 들판 가득 넘쳐 납니다. 무르익은 곡식들이 바람에 건들거리고 살찐 풀벌레들도 덩달아 뛰고 날며 흥겹습니다. 여름내 온갖 풍상을 겪어내고서는 이제 서로 풍성한 결실을 나누어 갑니다. 바람이 좋은 날은 슬며시 바람을 따라 나섭니다. 들바람이 좋은 날은 그리운 것들이 더 많습니다. 여문 추억들을 많이 내게로 데려다 주기 때문입니다. 들바람이 좋은 날은 당신에게로 가는 길도 훤하게 열리고 저는 그 길을 살포시 걸어갑니다.

겨울 강변길

겨울 강변길 김홍래 오늘은 당신이 보고 싶어 강변으로 난 둑길을 걸었습니다. 먼데 하늘 아래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수북이 눈 내린 겨울 강변길엔 간간이 바람이 불고, 간혹 남은 묵은 나뭇잎들은 빛바랜 깃발로 펄럭이고 얼어붙은 강은 오롯이 침묵에만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냥 당신 생각만 하며 뚜벅 뚜벅 강변길을 걸었습니다. 텃새 떼들이 강바람에 떨며 이리 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아마도 새들은 머릿속이 하얘지도록 당신만을 생각하며 설한(雪寒)의 강변으로 나선 나를 나무라겠지요.

겨울 바닷가의 꿈

겨울 바닷가의 꿈 싸락눈이 하얗게 하늘을 흔들던 겨울 어느 날 잔 자갈들 부대끼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바닷가 작은 찻집에서 당신과 함께 커피를 마시다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당신의 향기에 취해 한참을 헤매이다가 당신과 단둘만이 사는 나라로 갈 수 있는 낡은 목선 한 척을 발견하고는 환한 얼굴로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습니다. 참 기분 좋은 꿈이었습니다.

나무에게

나무에게 너를 꿈꾼다. 사계절 무욕(無慾)인, 그래서 행복한 너를 꿈꾼다 이 풍진 세상 얼만큼을 더 살아 내야 너처럼 무념, 무욕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한 세상 욕심과 집착 없이 살다가 네가 사는 산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 가다가 하나뿐인 몸뚱어리마저도 훌훌 버리고 떠나는 너처럼 살아 갈 수 있다면... 무욕을 꿈꾼다. 너를 꿈꾼다.

향일암에서

향일암에서 창창한 남해의 끝자락 수평선은 홀로 뒤척이고 툭, 툭, 투-욱... 단애(斷崖)에 걸린 동백들은 벌겋게 옷섶에 불을 놓는다. 풍경(風磬)도 잠이든 겨울 오후의 관음전 선승이 다 버리고 간 자리엔 무념(無念)의 시공(時空)과 무채색 적멸(寂滅)의 향기! 거북(龜)등을 쓸어오는 천년의 바람 수척한 겨울숲에선 고사목(枯死木) 넘어지는 소리 타박 타박 산문(山門)을 나서는 젊은 시인의 가슴엔 그저 한 주먹 말간 적막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