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
스 스 스 사사삭 스스스......
비 그친 뒤에 이는 한 타래 바람에
굴참나무 꼭대기
나뭇잎 갈리는 소리
메아리 되어 돌아오는 불경 소리
멀리 발 아래로 굽어보이는
신작로를 바라보고 서있는
스님의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만큼이나
세월이 무겁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려 해도
그 자리에 서있고
뒤를 돌아보아도 그냥 그 자리
이런 날에
암자의 뜨락에 서있을라치면
잊히지 않는 기억이 미울 때가 있다
이제 어둔 산을 내려서면
기억의 찌꺼기가 조금 남아 있어도
그냥 그 자리에 두 다리를 걸친다
가을 금강에 가면
가을 금강에 가면
강을 따라 난 작은 길섶으론
군데군데 연보랏빛 쑥부쟁이 군락들이
함초롬하고 청초하다.
강 언덕 위에는
탐욕의 보따리를 가득 실은
무거운 자동차들이
쉼 없이 도시로, 도시로 미끄러져 간다.
멀리서, 굽은 강변길을 걸어가는
여인의 가벼운 어깨가 실룩거린다.
가슴 속에 품고 온 버거운 짐들을
다 강물에 버린 모양이다.
나도 따라가며 강물에 던져 버린다.
내 몸도 이내 마른 풀잎처럼 가볍다.
무던히도 스스로 몸 낮추며
속 깊어 지는 강물에게 미안하다.
가을 금강에 가면
나도 순한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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