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2막
2019년 마지막 즈음에 나는 ‘면접시험’을 보러 나섰다. 중등교사 임용고시를 보고 난 후 근 30년 만에 면접을 보게 된 것이다. 건강상의 이유로 천직으로 여기던 교직을 일찍 명예퇴직하고 수년 간 병마에 시달리며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모든 사회 활동도 접어야 했다.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직장을 은퇴하고 나면 참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학창 시절 조금 배우다 만 기타도 배우고 싶고, 봉사 활동도 하고 싶고, 등산도 하고 싶고, 세계 여행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 요즘 들어 몸이 좀 좋아지니 부쩍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다니던 직장을 어쩔 수 없이 그만둔 때문인가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다시 직장에 서 동료들과 어울려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고 싶다.
나는 새로운 일자리에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인터넷에서 구인 광고를 찾아 여기저기 지원서를 넣었다. 1차 서류 심사에서 합격했다고 두 군데서 연락이 왔다. 너무나 반갑고 고마웠다.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하는 회사가 있다는 것이 큰 아픔을 겪고 난 나에게 진정 많은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었다. 처음으로 연락이 온 곳은 환경 관련 회사였다.
정말로 오랜만에 취직을 위한 ‘면접시험’을 보게 되었다. 나는 면접 통보를 받은 날부터 많이 설렜다. 소풍을 떠나는 어린아이처럼 밤잠을 설치며 면접 날을 기다렸다.
면접 당일 일찍 일어나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아내의 응원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새로운 일과 낯선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늘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한다. 하지만 면접을 보러 가는 마음은 들뜨고 마냥 즐거웠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때 여러 회사에 면접을 보러 다니던 일이 생각났다. 친구들과 서로 취업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며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하던 기억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하철을 타고 서둘러 회사에 도착하니 예정 시간보다 4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나는 곧장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회사 근처에 제법 큰 사찰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도 보낼 겸 사찰 경내를 둘러보았다. 사찰이 있는 청량산에서는 인천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탁 트인 시원한 조망에 가슴까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경내를 한 바퀴 돌고 나니 면접 시간이 거의 다 되어 회사로 발길을 돌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제법 규모가 있는 중소기업이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말쑥한 정장 차림의 젊은 직원이 반갑게 인사하며 면접 대기실로 안내했다. 대기실은 지하에 있었는데 깔끔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이미 많은 응시자가 모여 있었다. 안내하는 직원은 회사 팸플릿 한 권을 주며 자리를 알려주고 다과를 먹으며 기다리라고 하였다.
대기실에는 팽팽한 김장감이 감돌았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하고 차를 마시는 사람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잠시 자리에 앉았다가 일어나 차와 과자를 이것저것 골라 먹으며 여유 아닌 여유를 부렸다.
면접을 보러 온 사람들 대부분은 막 대학 졸업했거나 졸업을 앞둔 20대의 청년들이었다. 첫 직장을 구하려는 사회 초년생들이다. 나이 든 사람은 나를 비롯한 3명이었는데, 다니던 직장을 정년퇴직하고 다시 일자리를 찾는 분들이었다. 예전에는 정년퇴직하면 주로 집에서 손주들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 대세였다. 하지만 백세시대인 오늘날은 일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 같아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3명의 면접관이 면접을 보는데 가운데 자리한 사장님은 나이가 어림잡아 70대 초반은 돼 보였다. 처음에는 업무적인 것보다 인생 살아가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었다. 그러고 난 다음 본격적으로 업무에 관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나는 긴장한 탓에 좀 떨리기는 했지만 담담하게 소신껏 답변했다. 사장님은 연세가 많음에도 일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대단한 것 같았다. 여러 가지 특허를 획득했고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런 사장님을 보니 나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산 것 같아서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면접 인원이 많아서 다소 시간이 지체되었다. 면접을 마치고 나니 오후 3시가 다 되었다. 거리에는 성긴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나의 새로운 도전이 꼭 성공하길 기원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볍고 상쾌했다.
나는 1주일 후 최종 합격의 낭보를 받았다. 합격을 알려 주는 여직원의 목소리가 무척 밝았다. 내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고 명랑해졌다. 새해 1월 2일부터 회사로 출근하라는 전화였다. 내 인생의 아름다운 2막이 시작된 것이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다시 일할 수 있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를 얻은 것이다. 가슴 벅차고 뿌듯한 마음에 행복감이 밀려왔다. 나의 모든 열정을 쏟아 인생 후반기에 열심히 일하며 짜릿한 성취감도 맛보고 싶다. 나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보고 싶다.
언제나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일깨우는 동시에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정체되고 어둡던 내 삶에 밝고 즐거운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염원하던 소중한 일자리를 얻은 만큼 자신감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진력할 것이다.
기회를 준 회사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2020년에는 그동안 미루어 왔던 봉사 활동도 하며 내 생활을 더욱 활기 넘치고 풍요롭게 가꾸어 가야겠다.
-전북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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