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마을 詩情 산책/최근 발표 작품

상큼한 깨잎 향기/가온문학.2020.여름호

산마을 풍경 2020. 8. 22. 16:30

상큼한 깻잎 향기

(가온문학.2020.여름호)

 

 

 

 

 

 

우리 친구 3가족은 매해 여름이면 강원도 영월로 함께 휴가를 떠난다. 이번에는 각자 나누어 맡은 짐들을 챙겨서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의 한 농협 앞에서 만났다. 더워서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모두 환한 얼굴이다. 우리 일행은 곧 농협마트에서 3박 4일 동안 필요한 먹거리와 생필품을 구입하였다. 신림에서 88번 국도를 따라 영월 쪽으로 20분쯤 달리니 도로 변에 찐빵집 간판이 많이 눈에 들어온다. 예전부터 찐빵으로 유명한 황둔리다. 이곳에서 우리는 차를 근처 주차장에 세우고 맛이 좋기로 소문났다는 막국수 집에서 막국수와 감자 부침개로 점심을 먹고 이곳에 사시는 친구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93세인 어머님은 아직도 너무나 정정하신 모습으로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 주셨다. 어머니는 이내 밖으로 나갔다 오시더니 찐빵 한 상자를 우리 앞에 내놓으셨다. “여기 오면 이건 꼭 먹고 가야지” 하시며 맛있게 먹으로 라고 하셨다.

동강을 따라 난 강변로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하니 오후 2시가 조금 넘었다. 이곳 계곡은 밖에서 보면 매우 좁은 계곡 같이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계곡을 끼고 제법 넓고 평탄한 지형이 나타난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울창한 숲이다. 동강의 지천인 이 계곡은 물이 수정처럼 맑고 깨끗하며 주변 산은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처녀림 그대로다. 청량한 공기가 폐부 깊숙한 곳까지 말끔하게 씻어 준다. 기분이 저절로 상쾌해진다. 이곳에는 가운데 위치한 산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계곡이 뻗어 있고 계곡을 따라 1차선 보다 조금 폭이 넓은 도로가 산 능선까지 나있는데 경사도 완만한 편이다.

우리 일행은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산책을 하였다. 계곡 물소리와 새소리, 풀벌레 소리가 어우러져서 만들어 내는 싱그럽고 맑은 화음이 온갖 공해와 욕망에 찌든 도시에서 온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넉넉하고 짙푸른 녹음으로 충만하다. 탱탱한 초록색의 날실과 씨실로 잘 짜여진 주단(綢緞) 위를 걷는 듯 가볍고 즐겁다. 곤비(困憊)한 회색빛 이었던 내 영혼도 어느새 푸르게 물이 들어 자작나무 잔가지처럼 찰랑거린다.

얼마간 계곡 따라 난 길을 걷는데 풋풋하고 튼실하게 잘 자란 들깨밭이 나왔다. 들깨 향기가 그윽했다. 친구 한명이 “깻잎이 참 싱싱하고 예쁘네.” 하며 깻잎을 따기 시작했다. 예닐곱 잎 정도 땄을까? “거기 뭐하는 겁니까?” 하는 앙칼진 여인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남의 밭에 깻잎을 주인 허락도 없이 그렇게 따도 됩니까? 그럼 우리는 농사를 어떻게 집니까” 하면서 엄중 항의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우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친구는 채취한 깻잎 몇 장을 들고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선생님 앞에서 꾸중을 듣는 학생의 모습 같기도 하였다. “싱그럽고 너무 이뻐서 저도 모르게 몇 잎 땄네요. 죄송합니다.” 친구는 주인에게 정중히 사과하였다. 곁에 있던 우리들도 “죄송합니다.” 하며 머리를 숙였다. 다행히 주인은 더 이상 우리를 추궁하지 않고 돌아갔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불현듯 어릴 적에 하던 서리 생각이 났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시절에는 먹거리가 지금처럼 넉넉하지 못하였고, 삼시 세끼 먹는 밥 외에 간식거리는 별로 없었다. 여름에는 오이 서리, 참외 서리, 복숭아 서리를 하고 가을에는 콩서리 감 서리를 하였다. 긴긴 겨울밤에는 닭서리나 토끼서리, 무서리를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여름밤에 서리해온 과일을 개울물에 씻어서 친구들과 달빛 아래서 둘러 앉아 배불리 먹을 때는 더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방학은 또래 친구들끼리 모여 서리하여 허기진 배를 채우고 즐기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어린아이들이 서리를 하면 주인은 멀찌감치에서 못 본체하거나 아예 대놓고 먹을 만큼만 따가라고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당시에는 동네 어른들도 잘 이해해 주고 하였지만, 아마 지금 같으면 절도죄로 당장 쇠고랑을 찰 것이다. 문명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인정이 메마르고 이기적이라고 하지 않던가. 지금에 와서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면 그때는 먹을거리가 부족하고 여러 가지 불편한 것들도 많았지만 이웃 간에 정이 많았고 참 따뜻했던 것 같다.

들깨밭 주인의 입장에서는 유원지에 휴가 오는 많은 사람들이 오며 가며 깻잎을 따가면 들깨는 제대로 발육을 못할 것이다. 휴가 온 사람들은 재미 삼아 몇 잎 딴다지만 농가의 입장에서는 생업을 망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주인에게 싫은 소리 들은 것이 이해가 되고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튿날 아내들은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고 남자들은 동강으로 천렵을 갔다. 며칠 전에 비가 내려서 강물이 많이 불어 있었다. 우린 족대를 가지고 강 언저리 풀밭과 돌을 뒤져 물고를 잡았다. 피라미, 빠가사리, 미꾸라지, 꺽지 등이 제법 많이 나왔다. 우리는 매운탕을 끓여서 점심을 먹고 어제와는 다른 길로 산책에 나섰다.

얼마를 걸어 올라갔을 때 큰 옥수수 밭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옥수수는 거의 다 여물었고 그 아래에는 들깨가 자라고 있었다. 옥수수를 수확하고 곧바로 이어서 들깨 농사를 짓는 그루갈이를 하는 것이었다. 옥수수밭 속에서 인기척이 나서 살펴보니 70대 할머니 한분이 들깨를 솎아 내고 남은 들깨에 북을 주고 계셨다. 이미 솎아낸 것들을 밭둑에 군데군데 쌓아 두었다. 싱싱하고 넓은 잎이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웠다. 친구 부인 한분이 깻잎을 보더니 욕심이 나는 가보다. “할머니 이 깻잎 좀 파시면 안 될까요?” 하니 할머니께서는 “그 거 너무 촘촘하게 나서 속아 낸 건데 바빠서 시장에 내다 팔러 갈 새도 없고……. “하시면서 ”요 아래 계곡에 놀러 오신 분들이지요? 한 무더기 가지고 가세요. “ 하신다. 뜻밖에 횡재를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너무 고맙고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얼른 지갑을 열어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보이며 ”할머니 이걸 그냥 가져가면 우리가 너무 죄송해서 그럽니다. “ ”이것 여기 두고 갈게요.” 했더니 한사코 그냥가라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가 산책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밭 가운데 있던 할머니가 다가오시더니 사람도 많은데 좀 더 가져가라고 하시면서 솎아 두었던 들깨 나물을 주섬주섬 한 아름을 안겨 주시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물을 나누어 들고 숙소로 돌아와 신선하고 풍성한 깻잎으로 쌈을 싸서 배불리 저녁을 먹었다. 깻잎은 한소쿠리가 남았다.

우리 일행은 휴가 일정을 마치고 가는 길에 음료수 한 병을 챙겨들고 그 옥수수 밭으로 다시 갔다. 할머니께 시원한 음료수라도 한 잔 드리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옥수수를 구입할 요량이었다. 옥수수 밭과 근처를 몇 차례 둘러보았다. 그러나 할머니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밭둑에 피어난 감빛 산나리꽃 무리들이 때 마침 불어오는 산바람에 꽃술을 흔들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우린 아쉬움을 뒤로한 채 휴가지를 떠나 왔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주섬주섬 한 아름 안겨 주시던 선한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직도 가끔씩 그 싱그러운 들깨잎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올 여름 휴가에는 상큼한 깻잎 향기가 나는 담박한 추억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루갈이 : 같은 경작지에서 일 년에 두 번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