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마을 詩情 산책/시인이 쓰는 산문

반가운 문자 한 통

산마을 풍경 2020. 2. 25. 13:28

 

반가운 문자 한통

 

 

 

 

 

 

 

 얼마 전의 일이다.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카톡으로 문자 한통이 날아왔다 김홍래 선생님이시죠?” 전혀 자신의 소개도 없이 불쑥 아는 체를 하니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누구시죠답장을 보냈다.”선생님은 저를 잘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ㅇㅇ중학교에 다녔던 김ㅇㅇ입니다. “ 라며 답장이 왔다. 나는 10여 년 전 청주의 모 중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00는 내가 담임을 했던 반 학생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아는 학생이었다. 무척 반가웠다.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잊지 않고 연락을 주다니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교사는 특히 퇴직 후에 제자들로 부터 연락을 받을 때가 가장 기쁘고 흐뭇하다. 그 학생의 담임을 맡은 다음 해 제천으로 발령이 나서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 학생을 정확히 기억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 그 학생은 순진하고 착한 학생이었다. 아주 성실하고 착실한, 요즘 말로 범생이었는데 김ㅇㅇ 학생과 다른 김ㅇㅇ 학생은 내가 다른 학교로 발령 난 사실을 알고 교무실로 찾아와서 눈물을 글썽 거리면서 말을 하지 못하고 한참을 서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흔치 않은 일이다. 서울서 오랫동안 교직 생활을 하며 담임을 맡았지만 다른 학교로 발령 난 선생님과의 헤어짐을 이토록 아쉬워하는 학생은 처음이었다. 나도 잠시 서운한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 졌었다. 그만큼 순수하고 마음씨가 여리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때 나는 아이들의 어깨를 감싸 안아 주면서 위로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학교생활을 하다보면 성실하고 착한 학생은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고 말썽피운 아이들이나 개구쟁이 아이들만 오래 기억에 남는다.

아마 나도 학창 시절에 착실하고 온순하였기에 선생님들이 잘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다른 김ㅇㅇ 학생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소질이 있었는데 성격에 좀 문제가 있었다.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질 못해서 쉬는 시간이면 복도 창가에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님도 걱정을 하시며 자주 학교에 찾아 오셔서 상담을 했었다. 내가 생활 지도하느라고 무척 애를 먹었다. 며칠 전에 문자를 했던 제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으로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조만간 한번 찾아뵙겠다고 한다. 벌써 10여년의 시간이 지났다. 제자가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지인을 만난다는 것은 가슴 설레고 기분 좋은 일 아닌가? 제자를 만나면 그 학교에서 담임을 맡았던 제자들의 근황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대학을 막 졸업한 패기 넘치는 젊은이를 만나서 미래를 향한 꿈과 힘찬 도전의 이야기를 들어 보아야 겠다.

 

문자를 받고 나니 문득 그 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일들이 떠오른다.

필자는 2009년 서울에서 청주로 발령을 받았다. 고향에서 남은 교직 생활을 하고 싶어서 이었다. 학생 수가 서울보다 20명이나 적었다. 수업이나 생활 지도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서울에서는 한 학급의 학생수가 50명이 넘다보니 교실에서 책상 사이를 다니기도 불편할 정도였다. 수업 시간에도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청주에서 와서는 수업을 하는데 인원수도 적고 아이들도 잘 따라주어서 수업하기가 한결 수월하였다. 수업 시간도 내가 의도한 대로 잘 진행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이들과 충분히 교감하면서 정말 신나게 열심히 수업을 했었다. 보람도 있고 힘든 줄 몰랐다. 처음 부임하여 나는 1학년 담임을 하게 되었다. 어느 학교나 개구쟁이와 말썽 피우는 학생은 있게 마련이다. 그래도 서울 학생들보다는 순박하고 선생님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나는 학생들의 생활 지도를 하면서 교칙을 어기거나, 숙제를 안 해온 학생들에게 방과 후 교실에 남아서 시()를 한 편씩 암송하도록 했다. 좋은 시 20편 정도를 인쇄하여 묵어서 교실에 걸어두고 본인들이 마음에 드는 시를 한 편씩 골라 암송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도 교실에 남아서 아이들과 함께 시를 낭송하거나 상담을 하였다. 또 다 암송한 학생들은 검사를 받도록 하였다. 검사에 합격한 학생들은 휘파람을 불면서 교실 문을 나갔다. 예나 지금이나 방과 후에 학교에 남는 것은 모두 싫어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좀 당황해 하는 것 같더니 이내 익숙해 져서 자기들끼리 들어 주고 하면서 많이 외웠다고 자랑하기도 하였다. 아이들에게 벌을 주면서 머릿속에 좋은 시 몇 편씩 남겨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오랫동안 교실에 남겨 두는 것이 미안하기도하고 한편으론 안쓰러워서 나는 종종 빵과 우유를 사다 주었다. 아이들은 맛있게 먹으며 좋아 했었다. 내가 지금 암송하는 몇 편의 시들은 중.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암송한 것들이다. 학창 시절에 외운 시들은 오래 가는 것 같다. 가끔 내가 아이들에게 벌칙으로 내주었던 시들을 암송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하다. 내가 시 암송을 시킨 이유다. 아이들도 아직 그때의 시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 아이들에게 빛바래지 않는 향긋한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의젓한 사회인으로 성장했을 제자들이 더욱 그리워지는 겨울밤이다.(20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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