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를 하며
올해는 예년 보다 추석이 이르다. 서둘러서 추석 전에 조상님들 산소 벌초를 해야 한다. 우리 집안은 그리 번성한 편은 아니다. 할아버지가 삼형제이시다. 조부께서 아들 형제와 딸님 두 분을 두셨는데, 둘째 조부께서 아들이 없어서 삼촌이 양자를 가시고 셋째 조부께서는 따님만 두 분을 두셨다. 오래 전부터 벌초 때는 두 집안의 자손들이 모여서 함께 했다. 벌초를 해야 할 산소는 모두 13기다. 자손들이 다 모이면 상당히 많다. 우리는 10여 년 전 까지만 해도 매년 날을 잡아 함께 벌초를 하였다. 오랜만에 형님, 삼촌, 조카, 당숙들이 모여 옛날 어린 시절 이야기도 나누고 술도 한 잔하면서 우애도 다지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날은 멀리 있는 사람들도 다모이니 시끌벅적하였다. 큰형님 댁에서는 벌초 꾼들을 위하여 떡을 하고, 옥수수도 삶고, 부침개도 부치고, 양조장에서 술도 받아오고 하여 벌초 전날은 흡사 잔칫집 같았다.
벌초 하는 날은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산소도 많거니와 멀리서 온 사람들이
당일 일을 마치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예초기가 있지만 전에는 전부 낫으로 벌초를 했었다. 하루 온종일 낫질을 하고 나면 어개와 팔이 무척 아팠다. 벌초하는 날은 점심 먹는 즐거움이 컸다. 여러 명이 한데 모여 모둠밥을 퍼놓고 먹는데 노동을 해서인지 점심은 꿀맛 같았다.
몇 해 전 형님 세분이 돌아가시고 부터는 산소가 한 곳에 모두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으므로 모두 다 같이 다니면서 벌초를 한다는 것이 비효율 적이라고 하여 사촌들과 반으로 나누어서 하고 있다. 예전처럼 북적거림과 재미가 없어졌다.
우리 같은 기성세대들은 벌초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안하면 큰 불효이고 죄를 짓는 마음인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조상 산소에 대한 애정도 적거니와 무척 번거롭게 여기는 것 같다. 나는 조카들에게 1년에 한 번 조상 산소를 돌보고 성묘를 하는 것인데 그 것도 못한다고 하면 어뜩하냐며 야단을 치기도 한다. 아마도 우리 세대가 죽으면 벌초란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이 점점 없어 질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우리나라 장례 풍습도 많이 바뀌고 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매장 비율이 20%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한다. 자연히 산소의 숫자도 엄청나게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형님과 여러 조카들에게 연락을 하였으나 이런 저런 사유로 못 오고 올해는 조카 2명만이 참석해서 아내와 필자를 포함하여 5명이 제초 작업을 하였다. 참석 인원이 적어서 용역 회사에서 인부 2명을 구하고 예초기를 임대하여 하게 되었다. 옛날 같으면 벌초 꾼이 열댓 명씩 모였는데……. 어쩐지 좀 쓸쓸한 느낌이 든다. 나는 허리가 아파 작업은 엄두도 못 내고 부모님 산소에도 갈 수가 없어서 산 아래 서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부모님 산소에 성묘조차 못해서 죄송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나를 대신하여 아내가 조카들과 열심히 인부들이 하는 일을 도왔다. 아내도 허리와 무릎이 아파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아내에게 참으로 미안하고 고맙다. 부모님 묘소 앞에 서니 문득 오래 전에 쓴 “벌초를 하며“ 란 시가 떠올랐다.
벌초를 하며
바람이고 싶어
인적 없어 외로운
벌판위로 날리는 바람이고 싶어
소슬한 10월의 바람이 되어
그대의 헝클어진 머리칼
빗질하고 돌아서선
선선히 잦아드는
바람이고 싶어
지천으로 널려있는
키 작은 봉분들
옛날에는 그래도 가끔씩은 들러
안부라도 물었을 터인데
빠른 초침의 뜀박질 뒤에는
다 낡은 초가지붕만 남아
‘내게 언제 또 찾아올
누가 있을까?
돌아누워도 외로운
3평 남짓한 내 방에서
숨 쉬며 잠들면 됐지‘
아무도 알아보는 이 없는
풀빛 바람이고 싶어 < 졸작 ‘벌초를 하며’ 전문 >
할아버지 산소 벌초를 마치고 나니 12시가 넘었다. 우리가 중.고등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식당도 꾀 있고 술집도 몇 개나 있고 술도가도 있었으나 지금은 면소재지에 식당도 하나 없다. 그야 말로 격세지감이다. 참으로 허망한 풍경이다. 시골 인구가 급속히 줄고 있어서다. 지금 농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거의 7-80대 노인들이다.
우리는 금수산 아래 남아 있는 유일한 식당인 ‘대추나무집’에서 손 두부전골을 시켜 맛있게 먹었다. 반찬은 산골 현지에서 나는 나물 반찬이 대부분이었다. 정갈하고 인공 조미료를 넣지 않아서 맛이 깔끔하였다. 두부는 주인장이 직접 농사 지어 수확한 콩으로 만든 것이라서 그런지 더욱 고소하고 맛있었다. 옥수수로 빚은 막걸리도 한 뚝배기를 시켰지만 운전을 해야 하니 먹을 수가 없었다. 인부 2분도 기계로 작업을 해야 하는데 술을 많이 먹으면 안 된다며 딱 한잔씩만 하셨다.
나는 그 순간 무언가 아쉽고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옛날 사촌들 까지 모두 다 모여 왁자지껄 점심을 먹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는 15분 남짓을 달려 단양 남한강변에 있는 증조부 산소로 향했다. 칡덩굴이 우거져서 산소의 형체를 알아 볼 수가 없었다. 1년 사이에 풀과 나무가 자라서 완전히 숲을 이루고 있었다. 다행히 비석 윗부분이 보여서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아마 올해 벌초를 하지 않는다면 내년에는 정말 찾지도 못할 것 같았다. 증조부님 벌초를 마치고 나니 오후 3시가 되었다. 구단양에서 5대조 산소까지 가는 지름길이 있지만 도로 폭이 좁고 가팔라서 올라가는 중간에서 차를 만난 다면 무척 위험하다. 우리는 안전하게 고속도로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단양읍 북하리를 경유하여 대강면에서 춘천 방면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단양휴게소로 들어가서 주차를 하고 예초기를 챙겨 산소로 향했다. 산길은 어렴풋이 경운기가 다니던 길이 나있지만 숲이 우거져서 길이 엉망이었다. 2km 정도의 산길을 걸어갔는데 산소를 쉽게 찾질 못하였다. 작년에도 산소 찾느라고 한참을 헤맸었다. 겨우 산소를 찾아 벌초를 막 시작 하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를 몽땅 맞았다. 이렇게 온몸으로 비를 맜기는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다. 비가 그칠 때를 기다렸으나 비가 그치지 않았다. 우리는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벌초를 해야 했다. 옷이 비에 흠뻑 젖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비가 내려서 힘들었지만 말끔해진 산소를 보니 기분이 상쾌하고 마음이 한결 개운하다. 벌초를 마치고 준비해간 제수로 간단하게 제사상을 차리고 술을 붓고 절을 올렸다. 휴게소에서 조카들과 작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기가 찾아왔다. 집에 오니 설핏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집에 와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조카들에게 수고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조카들은 삼촌과 숙모님께서 고생 많으셨다고 위로 하였다.
오늘은 1년에 한번 조상님들 산소 벌초를 하고 성묘도 하며 조상님께 감사하는 하루였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날아갈 듯 가볍고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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