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통 / 김혜순
얼굴을 붉힌 채 기다리고 있다 해야 하나. 이별하려고 기다린다는 말을 말아야 하나. 순결이란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굴까.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인 사람. 창구에 앉은 여자처럼 받은 것은 무조건 돌려보내는 나를 뭐라고 해야 하나.
이미 피를 흘려봤다고 해야 하나. 피 묻은 얼굴이라고 해야 하나. 들어온 것은 반드시 내보내는 가엾은 심장이라고 해야 하나. 흰 손바닥이 가슴에 들어왔다 나간다. 영장류의 손바닥은 왜 비닐 코팅된 감촉일까. 생은 막幕일까. 나는 너에게 당당히 말한다. 나는 너를 간직하지 않겠다.
불 꺼진 부화기 안에서 불을 켜달라고 소리쳐야 하나. 익일 특급 우편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아이를 싸서 주소를 쓰고 침을 발라 눈을 감긴다. 온몸 가득 스탬프 찍어 아이를 반송한다. 자꾸만 돌아오는 아이를 또다시 보내려고, 아침 9시부터 문을 열었다가 정각 5시에 닫는다고 정문 앞에 고지해야 하나.
[날개 환산통], 문학과지성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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