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마을 詩情 산책/내가 사랑하는 詩

엄마 /노춘기

산마을 풍경 2017. 5. 24. 22:25

엄마

노춘기

길 위에서 죽은 사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하며 나는 살아왔다


쑥부쟁이 거칠게 뒤덮은 뒤안

한가운데 흰 새 한 마리 묵묵히

구름을 토해낸다


젖은 구름의 액토플라즘

텃밭을 떠나는 일가족의 뒷모습


축축한 도마 위에서 차가운 설겆이 다라이에서

당신은 긴 손가락을 씻고 또 씻는다

초식동물의 창자처럼 구불부불한 시간들이

손 끝에서 차갑고 미끄럽게 꿈틀거린다


부엌 한 귀퉁이에 도사린

둥근 전기 밥솥에서 새어나오는

밥냄새 밥냄새, 아직 누구 하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미닫이문의 흐린 유리창이 밤바람에 흔들리고

모두의 허기가 도마 위에서 웅성거리는


빈 집의 가장 깊은 쪽으로부터

당신은 긴 다리를 무겁게 옮기는 재두루미처럼

녹슨 대문 밖으로 하얀 목을 내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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