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마을 詩情 산책/내가 사랑하는 詩

파뿌리/문정희

산마을 풍경 2020. 10. 6. 08:25

파 뿌리 / 문정희 

 

크고 뭉툭한 부엌칼로 파 뿌리를 잘라낸다
마지막까지 흙을 움켜쥐고 있는
파 뿌리를 잘라내며 속으로 소리지른다
 

결혼은 왜 시를 닮으면 안되는가
질기게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가
뿌리 없이 가볍게 날아다니는 깃털이란
그토록 두렵고 불안하기만 한 것인가
언제나 정주(定住)만을 예찬해야 하는가
가축처럼 번식과 무리를 필요로 하고
영원히 동반이어야 하는가
검은 머리는 언제 파뿌리가 되는가
 

나 오늘 파 뿌리를 잘라낸다
부엌칼 중 제일 크고 뭉툭한 칼로
남은 파를 술술 썰어
펄펄 끓는 찌개에 쓸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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