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
'♣ 산마을 詩情 산책 > 내가 사랑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담쟁이 / 도종환 (0) | 2020.05.16 |
|---|---|
| 표백漂白/김성신 (0) | 2020.04.02 |
| 그런 저녁이 있다 (0) | 2020.03.17 |
| * 무심(無心)에 관하여 / 허형만 (0) | 2020.03.12 |
| 내가 좋아하는 너는/이해인 (0) | 2020.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