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도바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of Cordoba; 1984)
안달루시아(Andalusia) 자치 지방, 코르도바(Cordoba) 주에 속하는 코르도바는 8세기 무렵 이곳을 점령한 무어 인에 의해 황금기를 누렸다. 당시 건설된 300여 개의 모스크, 수많은 궁전, 공공건물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과 다마스쿠스(Damascus), 바그다드(Baghdad)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대모스크[Great Mosque]는 13세기 성왕(聖王) 페르디난드 3세(Ferdinand III) 통치 기간에 대성당과 새로운 방어 구조물로 개조되었다. 도시에 있는 방어용 구조물로 특히 망루 구실을 하던 칼라오라 탑[Torre Fortaleza de la Calahorra]과 요새 알카사르[Alcazar de los Reyes Cristianos; 기독교 군주의 성채]가 유명하다.
코르도바 역사 지구는 현재 모스크-대성당 주변에 있는 모든 블록 내의 주택과 기념물 주변 거리, 그리고 이 거리에서부터 넓게 펼쳐진 구획된 토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은 남쪽으로 과달키비르(GuadaIquivir) 강의 먼 제방[로마 양식의 다리와 성(城)을 포함]까지, 동쪽으로는 산 페르난도(San Fernando) 거리, 북쪽으로는 상업 중심지의 경계까지 확장되어 있으며, 서쪽으로는 알카사르와 산 바실리오(San Basilio) 거리를 포함한다. 그 범위와 설계 면에서, 그리고 이곳에 존재했던 서로 다른 문화와 생활이 표현된 기념물들의 역사적인 중요성 덕분에 이 도시는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코르도바의 지리적 특징은 두 가지로 정의되는데 광물 자원이 있는 시에라 모레나(Sierra Morena) 산맥과 이 산맥을 에워싸고 흐르는 과달키비르 강이 있다는 것이다. 이곳은 ‘교역과 방어’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인간이 정착하게 된 지역 유적이다. 이 지역의 초기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융성했던 카르타고의 거주 지역이었다가 도시의 전략적・상업적 중요성을 알아차린 로마인이 기원전 206년에 이곳을 점령하고 이스파니아(Hispania; 로마 인들이 사용했던 이베리아 반도의 옛 이름) 속주(屬州), 즉 바에티카(Baetica; 고대 로마가 이베리아 반도에 설치한 3개 자치주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도시는 미려한 공공건물과 개인 가옥이 경관을 형성했고, 독특한 요새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곳 출신의 유명인으로는 2명의 세네카(Seneca)와 시인 루칸(Lucan)이 있다. 6세기에 이방인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의 로마 사회는 흔들렸고, 코르도바는 서(西)고트 족에게 함락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것이 파괴되었지만 코르도바는 서고트 족의 지배 아래 도시의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711년에 코르도바는 과달레테(Guadalete)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타리크 이븐 자위드(Tarik-ibn-Zayid)가 이끄는 무어 인 정복자들에게 처음으로 점령당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압달라만 1세(Abd-al-Rahman I)가 756년에 다마스쿠스의 칼리프 지위에서 물러난 뒤, 코르도바에 자신의 왕궁을 건립하면서 이 도시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를 위한 토대가 만들어졌다. 그는 786년에 로마의 야누스 사원이 있던 자리에 대(大)모스크를 건설했는데 훗날 서고트 족에 의해 다시 교회로 변경되었다. 그는 다마스쿠스의 모스크보다 더 빛나는 구조물을 세우려 했으며, 이 작업은 2세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코르도바는 예술과 지식의 탁월한 우월성을 지니고 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하게 용인해 주면서 거대 왕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위용을 보자면 코르도바는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의 장관에 필적하는 300채 이상의 모스크와 수많은 궁전, 그리고 공공건물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칼리프가 다스리던 지역은 1009~1031년의 격렬한 내전 이후에 붕괴되었으며, 대모스크만이 번영했던 시절의 상징물로 남게 되었다. 아노라비드(Ahnoravid)가 권력을 계승하고, 그 결과 12세기 코르도바에 아우오아드(Ahuohad) 왕조가 들어서면서 알 안달루스(Al-Andalus)의 수도로 삼아 이전의 영광을 대부분 복구했다. 도시의 지성적인 면모는 아베로에스(Averroes; Abu Walid-ibn-Rusch)와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Musa-ibn-Maymun)와 같은 위대한 학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236년에는 페르디난드 3세가 코르도바를 점령했고 도시는 다시 기독교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모스크는 대성당으로 바뀌었으며, 빈번한 무어 인의 공격 위협을 막아내는 국경 도시라는 역할에 걸맞게 알카사르와 칼라오라 탑 사이에 새로운 방어 구조물을 높이 쌓았다. 모스크-대성당이 주변에 밀집한 이 역사적 중심지는 특징적인 좁고 구불구불한 거리와 함께 중세 도시의 구조를 상당 부분 잘 보존하고 있다.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걸친 기독교 지배를 재건하면서 코르도바는 그 정치적・지성적 중요성이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시에라모레나의 구리 광산이 부근에 있었기에 상업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로마의 지배는 일찍이 지나갔지만 그 시대의 증거는 분명히 남아 있다. 유속이 빠른 과달키비르 강에 가로질러 놓인 3.7m의 다리가 그 예이다. 1세기 무렵에 사원의 기둥들과 알카사르의 멋진 모자이크, 로마 양식으로 만든 벽의 단면도 있다. 알카사르의 정원들은 모스크 주변 지역에 무어 양식으로 설계했는데 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점에서 무어-안달루시아 양식 정원의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기념물이 될 만한 칼리팔(CaliphaI) 목욕탕 유적도 이 부근에 있다. 무어 인이 지배하는 동안 대모스크 주변에는 작은 예배당이 많았다. 그 중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남아 있던 첨탑들은 산티아고(Santiago), 산 로렌소(San Lorenzo) 교회와 산타클라라(Santa Clara)의 은둔처가 되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중요한 기념물로는 알모도바르(Almodovar) 문이 있다. 원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유대인 구역으로 알려진 곳에 무어 양식 코르도바의 중요한 유대인 기념물들과 1492년 유대인 추방 이후 기독교인이 사용한 작은 시너고그(Synagogue; 유대인 회당)가 있다. 알카사르의 기독교 구조물들은 왕족의 거주지로서 14세기 초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 건축물들은 무데하르(Mudejar) 양식의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 준다. 칼라오라 탑은 기독교 시대의 초입부터 중세 요새의 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산 하신토(San Jacinto) 교회는 화려한 고딕 양식이다. 이 교회는 오늘날 의회 건물과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무어 양식에 기반을 둔 산 바르톨로메오(San Bartolomeo) 예배당은 이제 고딕-무데하르 양식의 명백한 기독교 건물이 되었다. 산 프란시스코(San Francisco)와 산 니콜라스(San Nicolas)의 교회도 같은 시기에 지은 것이다. 이밖에 중요한 건물들은 16세기부터 건설되었다. 종교적・군사적 용도와 건축 양식을 보여 주는 산 펠라히오(San Pelagio) 신학교, 푸에르타 델 푸엔테(Puerta del Puente; 교량의 문), 파에스(Paez) 가문 저택, 푸엔산타(Fuensanta) 계곡의 마르케스(Marques) 저택 등이다. 18세기부터 출현한 시민 건물로는 ‘성 라파엘(San Rafael)의 개선(凱旋)’과 카르데날 살라사르(Cardenal Salazar) 병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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