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休 心 停<휴심정>/세계문화유산탐방

세계문화유산(428)-스페인/ 타라코 고고 유적군

산마을 풍경 2020. 1. 4. 00:03

세계문화유산(428)/ 스페인


타라코 고고 유적군(Archaeological Ensemble of Tarraco; 2000)

 



 



 



 



 



 



 



 



 



 



 



 



 



 



 

  타라코[오늘날의 타라고나(Tarragona)]는 카탈루냐 자치 지방[Autonomous Community of Catalonia], 타라고나 주[Province of Tarragona]에 속하며, 로마 제국에 합병된 스페인의 중요한 행정・상업 도시였고,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를 통틀어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중요 식민 도시였다. 로마 시대의 빼어난 건축물이 많으며, 잇따른 발굴 작업을 통해 그 일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물 대다수는 온전하지 않지만 수많은 유물들이 오늘날에 세운 건축물 아래에 묻혀 있다. 그러나 이 유물들은 과거 로마 제국의 식민 도시였던 타라코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타라코의 로마 시대 유적은 로마의 도시 계획과 설계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다. 타라코는 로마 제국이 다른 지방의 수도를 건설하는 데 모델이 되었으며, 지중해 연안의 고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한 시기를 더없이 생생하게 재현해 주는 훌륭한 증거 자료이다. 기원전 1000년 초기에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 인[Ionian]이 이곳에 교역을 위해 정착촌을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5세기에 이베리아 반도의 토착 부족이 케세(Kesse)라는 거주지를 건립되었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기원전 218년에 로마 제국의 식민지 총독이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가 이 도시를 함락하고 요새로 만든 것은 제2차 포에니 전쟁[Punic War] 당시였다. 당시 이탈리아와 전쟁 중이던 카르타고(Carthago)에서 한니발(Hannibal)에게 보내는 전력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기원전 217년에 에브로(Ebro) 강 하구에서 카르타고의 함대가 괴멸함으로써 로마는 이베리아 반도의 이 지역을 더욱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었다. 타라코는 역사가 오래된 정착촌이다. 로마 제국이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장악하는 데 전초 기지 역할을 한 타라코는 훗날 로마 제국의 지방 수도가 되었다. 폼페이우스에 대항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easer)를 도와서 로마에 충성심을 보여 준 대가로 타라코는 콜로니아 룰리아 우르브스 트리움팔리스 타라코(Colonia Iulia Urbs Triumphalis Tarraco)라는 명예로운 이름과 함께 식민지 도시의 지위를 하사받았다. 기원전 27년에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 시절에 타라코는 로마제국 히스파니아 시테리오르(Hispania Citerior) 주의 수도가 되었다. 당시 시테리오르 주는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그 지위에 걸맞게 타라코에는 로마 제국의 강성함을 증명하는 웅장한 공공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아우구스투스와 하드리아누스(Hadrianus)를 비롯한 몇몇 로마 황제들은 이 도시를 방문했다. 이 도시는 관리들을 한데 불러 모아 회의를 개최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성 바울이 직접 전한 전설에 따르면 일찌감치 기독교가 침투한 타라코는 주교구가 되었다. 이 부유한 도시는 야만족이 약 250년 동안 약탈을 자행하던 시기에 프랑크 인[Franks]이 폐허로 만들었지만 이내 복원되었다. 5세기에 서고트 인이 지배하기 시작한 타라코는 469년에 에우리크(Euric)가 거의 완벽하게 파괴할 때까지 존속했다. 714년에는 무어 인[Moorish]의 영토에 편입되었으나 기독교 세계와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후 수세기 동안 타라코는 계속해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잠깐 탈환하기도 했지만 타라코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주민이 떠난 이 도시는 1148년에 라몬드 베렝게르 4세(Raymond Berenguer ⅳ)가 토르토사(Tortosa)에서 무어 인을 완전히 격파한 후에야 비로소 기독교 세계로 돌아갔다. 다시 노르만 인(Norman)이 거주하게 된 타라코는 1220년에 전쟁 왕 알폰소(Alfonso)가 무어 인을 카탈루냐에서 완전히 쫓아낸 후, 카탈루냐에 편입되었다. 이 도시에 적용된 로마 시대의 독창적인 설계는 매우 특별한데 그 예로 지방 포럼(forum)과 지형에 맞추어 거주지를 인공 계단식 구조로 설계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타라코에는 중요한 건축물 유적의 다수가 지하에 매몰되어 있다. 그 중에는 칼레 멘데스 누녜스(Calle Mendez Nunez)의 둥근 천정처럼 완벽하게 보존된 것도 있다. 타라코의 성벽으로 대표되는 방어 체계는 로마 제국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펼친 군사 공학의 초기 사례를 볼 수 있다. 또한 고대로부터 19세기에 이를 때까지 이 도시의 형태를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기도 하다. 이 성벽은 오푸스 실리체움(opus siliceum)이라고 알려진 이탈리아의 독특한 공법을 이용해 쌓았다. 오푸스 실리체움은 에트루리아(Etruria)와 라티움(Latium)에서 사용하던 공법이라고 한다. 내부와 외부에 장식을 한 성벽 일부가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그 안에는 거석으로 세운 성문들과 함께 미네르바(Minerva), 카피스콜(Capiscol), 여러 기의 대주교 탑 등과 같은 보루가 남아 있다. 거대한 건물군은 옛 건축물 유적이 있는 도시의 배치를 압도하고 있다. 3단의 계단식 구조로 형성된 거대한 단지는 조각이나 장식된 유물에 새긴 그림에서도 드러나듯이 수준 높은 정치적 의도로 이용하여 히스파니아 시테리오르의 여러 마을을 로마제국 안으로 끌어들였다. 건축물의 세부와 여기에 사용된 수입 자재를 보면 이 건축물을 지은 건축가와 장인들이 로마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에서 온 이탈리아의 전문가들은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하던 로마 시대 구조물 3동의 작업에도 참여했다. 타라코 주변에는 유명한 채석장이 여럿 있었으며, 이곳에서 돌을 캐다가 로마 시대의 구조물을 세웠다. 물론 여기에는 첸트첼레스 빌라-원형 무덤[Centcelles villa-mausoleum]을 비롯한 호화로운 저택 몇 채와 기원전 2세기에 세우고 훗날 확장한 수수한 빌라 루스티카(villa rustica), 거대하고 화려한 저택인 델스 문트스 빌라(Dels Munts Villa)도 있다. 로마 시대 마을은 주정부 청사와 더불어, 언덕 꼭대기와 그 아래에 형성된 두 줄의 계단식 구조 위에 있다. 중요한 건축물들은 다음과 같다. 스키피오 장군이 쌓은 성곽, 황제 숭배 성역, 주랑이 딸린 광장인 지방 포럼,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로마 시대의 콘크리트로 건설한 원형 광장, 거대한 저수지와 항만 시장이 있던 자리에 지은 극장, 트라야누스(Trajanus) 또는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 시절에 약 14,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도록 축조한 원형 경기장, 프룩투오수스(Fructuosus), 아우구리우스(Augurius), 에울로기우스(Eulogius) 3명의 순교자에게 봉헌한 서고트 양식의 교회, 전통인 라틴십자 형태로 세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3명의 순교자를 숭배하기 위해 만든 고대 기독교 공동묘지와 그 위에 세운 교회, 아치가 두 줄로 이어지는 수도교, 스키피오의 탑, 타라코 지역의 경계를 표시해 일종의 영역 표시로도 볼 수 있는 베라(Bera)의 개선문 등이다. 그 중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하부 구조는 대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교회 안의 장식은 시토회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스키피오의 탑은 실제 스키피오 장군과 연관이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또한 고대 기독교 공동묘지와 그 위에 세운 교회 자리에는 고대 기독교 박물관이 세워졌는데 이 박물관에는 당시 고대 기독교 공동묘지에서 발굴한 많은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