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休 心 停<휴심정>/역사 산책

가짜 만리장성까지 만드는 중국

산마을 풍경 2017. 6. 19. 16:13

유석재 기자

중국 국가문물국과 국가측량국은 지난달 18일 만리장성(萬里長城)의 길이가 종전에 알려진 6300㎞보다 약 2500㎞가 더 긴 8851.8㎞라고 공식 발표했다.

우리로서는 만리장성이 좀 더 길어졌구나 정도로 무심히 넘어갈 수도 있는 발표지만, 사실 여기에는 한국 고대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도대체 무슨 얘길까?

일단 중국 정부의 발표를 보면, 만리장성은 동쪽으로는 랴오닝성(遼寧省) 단둥시(丹東市) 북쪽 호산(虎山)에서 시작해 10개 성 156개 현을 지나 간쑤성(甘肅省) 가욕관(嘉峪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인공 장성은 6259.6㎞이고 나머지는 지형을 이용한 자연 장성이다.

중국의 이번 발표는 (明)나라 때의 만리장성에 대한 조사였다. 우리는 보통 만리장성이란 기원전 221년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현존하는 만리장성은 10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명나라(1364~1644) 때 축조된 것이다.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찾는 팔달령(八達嶺) 부근의 만리장성 역시 명나라 때 것이다.

그런데 이번 발표에서 기존의 상식과 달라진 점이 하나 나온다. 서쪽 끝이 가욕관이라는 것은 달라질 게 없지만 동쪽 끝이 현재의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시(秦皇島市)에 있는 산해관(山海關)이 아니라 더 동쪽인 압록강변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국내 한 중국사학자는 일본인들이 실크로드의 동쪽 끝을 시안(西安)으로 보지 않고 훨씬 더 늘려 잡아 일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논리로 보인다고 말했다.

위략(魏略)에는 처음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만들 때 장군 몽염(蒙恬)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닿았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이 장성이 압록강까지 이르렀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이후 명나라 때 여진족을 막기 위해 산해관 동쪽으로 요동변장(遼東邊牆·요동 변경에 세운 담장)이라 불린 방어막을 쌓았다.

하지만 만리장성처럼 석성(石城)으로 쌓은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명나라 이후 최근까지 그것을 장성의 일부라고 여긴 사람도 없었다. 중국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1982년의 탄지샹(譚其<馬+襄>) 책임편집 중국역사지도집 7권을 찾아보니 산해관 동쪽의 요동변장은 장성(長城)이 아니라 호원(壕垣·도랑과 담)으로 표시돼 있었다. 거기에 성이 없었다는 것을 중국 스스로 시인했던 것이다

애당초 만리장성이란 중국의 영역을 표시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것이었다. 1990년대 이전까지 동서양의 어느 문헌에서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산해관은 관내(關內)관외(關外) 지역을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한(漢)문화의 영향이 미쳤던 원래 중국 땅은 산해관 서쪽인 관내 지역이었다. 관외, 즉 만주 지역은 원래는 중국 땅이 아니었던 곳으로 인식됐다. 만주족이 명나라를 공격했을 때 베이징 방어의 요새가 됐던 곳도 바로 산해관이었다.

그런데 압록강에 맞닿은 단둥의 호산에는 웅장한 규모의 장성이 세워져 있다. 최근 중국 당국이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만리장성 동쪽 기점이 바로 이곳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건너편 북한 신의주를 촬영하려는 사진기자들은 종종 이곳에 올라가서 망원렌즈로 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곳은 정말 만리장성의 동단이었을까? 한국학의 보고(寶庫)라 불리는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박작성(泊灼城) 항목에서 현재 단둥시 동북쪽의 호산산성에 비정(比定)된다고 해 놓았다. 고구려 산성인 박작성은 서기 648년 당 태종(唐太宗)의 침략에도 함락되지 않았던 견고한 성이었다.

서길수 서경대 교수(전 고구려연구회장)는 1998년 이곳에 와 보니 깊이가 11가 넘는 대형 우물이 있었는데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이었다지금까지 압록강 하구 일대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 산성이 바로 이곳이라고 말했다.

서 교수는 원래 이곳에는 명나라 때의 봉화대가 있었지만 장성은 없었고, 요동변장의 끝도 훨씬 북쪽인 봉성(鳳城) 일대였다고 말했다. 중국측이 만리장성을 압록강까지 닿게 하기 위해 가짜 유적을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중국 당국은 2004년 이곳에 호산장성을 증축하고 호산장성 역사박물관을 새로 만들면서 고구려 박작성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유적들을 훼손한 것으로 드러났다. 새로 지은 박물관 때문에 우물터는 사라져 버렸고 옛 성벽의 흔적은 북쪽 산기슭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박물관 안에는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라는 설명을 붙였을 뿐 아니라 만리장성을 평양까지 이어 그린 지도도 전시했다.

중국이 2004년 압록강과 인접한 단둥시 북쪽 호산에 새로 만들어 놓은 '호산장성'. 고구려 박작성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된 곳이지만 중국은 한국어 간판까지 걸어 놓으며 마치 이곳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서길수 교수 제공

왜 중국은 그런 일을 한 것일까? 노기식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1990년대 중국에서 국경 문제를 연구하는 변강학(邊疆學)이 대두하면서 동북쪽 변강학자들은 요동변장을 만리장성에 포함시켰다이제는 중국에서 요동변장과 만리장성이 별개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가 됐다고 말했다.

동북쪽 변강학자들은 다름아닌 동북공정의 주체였고, 호산장성 역사박물관이 문을 연 2004년 5월은 중국 당국이 지안(集安) 고구려 유적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앞두고 고구려가 중국사의 일부라는 역사 왜곡에 힘쓰던 시기였다.

노 위원은 명나라 때 요동에 쌓았던 요동변장을 중요시해 만리장성에 편입시킴으로써 요동은 물론 만주까지 원래 중국의 영토였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명나라가 변장 너머 만주에 있던 여진족까지도 확고하게 통치를 했다는 것을 넘어서서, 조선 초기 북진 정책을 통해 확보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땅까지도 원래 명나라 땅이었다는 논리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길수 교수는 이번 중국 당국의 발표에 대해 오래 전에 논리개발이 끝난 만리장성 동단 연장론에 대해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발표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요동과 만주는 물론 압록강·두만강 이남까지도 역사적으로 유구한 중국의 영토라는 강변은, 그곳에 존재했던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통째로 중국 역사로 가져가려는 동북공정의 근본적인 논리를 또 다시 드러낸 것이라는 얘기다.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그리고...

중국은 5월 1일, '새로 발견한 만리장성의 시발점'이라며 '호산장성'의 사진을 관영 신화통신을 통해 세계에 공개했다.

바로 이 사진이다.

 

 

사진으로 보기에도 최근에 만들어 놓은 짝퉁 만리장성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왜 저렇게 반듯하고 웅장한 성이 압록강 건너편에 있었다는 기록이 '열하일기' 같은 수많은 조선시대의 문헌들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고구려 박작성 유적을 깔아뭉갠 뒤에 저런 것을 세워놓은 것이다.

가짜 술, 가짜 분유, 가짜 계란, 가짜 시계, 가짜 명품...

이제는 '가짜 역사'인가. 딱하다.

(*기사에 차마 못 쓴 내용이 있는데, 그건 '만리장성의 시발점이 한반도'라는 설을 처음으로 제시하셨던 사람은, 그러니까 호산박물관을 비롯한 수많은 중국측 지도에 만리장성의 동단을 평양까지 이어 그리게 했던 근거를 마련하셨던 분은, 중국 학자가 아니라 바로 국내의 작고하신 저명한 학자... 그냥 실명을 쓰겠다. 두계 이병도 선생이었다는 것이다. 그분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갈석산이 황해도 수안이라는 주장을 일찍이 1977년 '낙랑군고'를 통해 펼치셨던 것이다. 만리장성이 시작된다는 낙랑군 수성현의 '遂'자가 황해도 수안의 '遂'자와 같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두계는 분명 큰 학자였고, 항간에서 비난하듯 '식민사학자'라는 일방적이고 단순한 표현으로는 그의 깊은 학문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 '낙랑군고'가 오늘날 동북공정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리라고는 아마 그 분도 예상하지 못하셨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 국사학계, 아마도 자승자박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