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산약초를 사랑하는 것은
아버지가 물려주신 밭에 20년 전부터 약용나무를 심었다. 나는 밭 입구에 약초농장 “산마을 풍경”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내가 산약초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척 오래 전부터다. 어릴적 동네 어른들은 나를 ‘약국집 손자‘라고 불렀다. 할아버지께서 충추에서 한의원을 하신 탓이었다. 어려서는 그냥 그려려니 했다. 내가 커서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는 ‘약국집 손자’라고 하면 듣기 좋았다. 커가면서 그말이 나에게는 큰 자부심이 되었다. 아버지나 삼촌, 고모 누구도 할아버지의 의술을 전수 받지 못하셨다. 나는 그 것이 많이 아쉽고 아타까웠다. 아버지나 삼촌이 작약이나 목단, 지황, 황기 같은 약초를 재배하셨지만 그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7조형제 중에서 한약초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아버지 대에서 못했으면 손자 누구라고 그 가업 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늘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솔직히 한의대를 갈 실력도 안될뿐더라 가정 형편도 어려워서 엄두 조차 낼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할아버지는 여러 동양고전에 능통하시고 역사에도 밝으시며 성품이 온유하고 인자하신 분이셨다. 반면 할머니는 엄청 엄하시고 고집이 세고 괄괄한 성품이셔서 어머니께서 시집살이가 무척 심하셨다고 하셨다. 얼마 전에 안 사실이지만 할아버지께서 며느리가 엄한 시집살이를 하시는 것을 아시고는 며느리 끼니 걱정을 하셔서 할아버지는 식사를 꼭 남기셔서 어머니가 드시도록 배려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성품과 자비로움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 제사삿 날에는 근동에 사는 어른들이 농사 지은 곡식이나 닭, 계란 등을 싸가지고 왔다. 스승님의 제사상에 올리라는 것이다. 제삿날이면 마당에 모닥불을 지피고 사람들이 모여 들어 왖자지껄했다.
제사가 끝나면 음복을 하고 늦은 밤에야 돌아갔다. 참 인간적이고 따스한 풍경이었다. 난 지금도 가끔 이 광경 떠올리면 흐뭇하다. 할아버지는 워낙 온유하시고 자상하셔서 동네 사람들로 칭송을 받으셨다고 한다. 내가 감명 깊게 읽을 책 중에 “동의보감”이란 책이 있다. 소설가 이은성씨가 의성(醫聖) 허준 선생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것이다. 뛰어난 의술도 의술이지만 환자를 대하는 정성과 한순간도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일상이 큰 감동을 준다. 이책을 나중에 MBC에서 역사드라마로 만들어 방영 되었는데, 국민들의 큰 관심과 사랑을 받은 것은 물론 중국 일본 등 동남 여러 국가에서도 인기리에 방영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책과 드라마를 접할대 마다. 할버지를 소환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멀리 가지 않고, 가급적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약재로 약방문을 써 주셨다고 한다. 또 재배하거나 산야에서 채취해서 말린 약재를 가지고 오면 금을 잘 쳐주셨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제삿날에도 잊지 않고 찾아 오는 것이다.
절치부심 끝에 소망하던 중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참으로 다양한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평소 소신대로 공부 못하는 아이들과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마음을 더 쓰고 배려하려고 애썼다. 지하 단칸방에서 할머니와 단들이 사는 아이들도 있었다. 무척 마음 겨웠다. 할머니는 늙고 부모들은 집을 나가 소식도 모른다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참으로 사정이 딱했다. 여기에 비하면 나의 학창 시절은 너무나 호강스러운 거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이런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접하면서 할아버지의 선한 영향력을 전파할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시골 밭에 약용나무를 심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당시 아버지가 물려주신 밭은 오랬 동안 농사를 짓지 않고 방치한 탓에 산이나 다름 없었다. 아내와 함께 개간 아닌 개간을 했다. 고향 인근에 사시던 둘째 누님께서 많이 도와 주셨다. 열심히 일군 덕에 옛날 모습을 많이 되찾았다. 감격스러웠다. 이곳에 가시오가피 나무, 마가목, 산사 나무, 헛개 나무, 꾸찌봉 나무를 심었다. 나무가 자라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나눔해야 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서울에서 관리를 하려니 제대로 관리하기가 어려웟다. 아예 지방 근무를 자처했다. 제천으로 발령을 받은 후부터는 제대로 약초농장을 관리할 수 있었다. 지금은 나무가 많이 자라서 약초를 제법 수확할 수 있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그 가르침을 조금이마마 실천 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쁘고 뿌듯하다. 내가 속해 있던 교원 단체나 교육청과 협조하여 여려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허리를 다쳐 전혀 일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나의 오래 된 계획과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안타까운 일이다. 가시오가피와 마가목은 뿌와리 열매, 나무를 모두 약용한다. 최근에는 꾀 많이 수확할 수 있게 되었다. 아내가 틈틈이 수확해 지인들과 친척들에게 나눔하고 친구들은 직접 채취해 간다.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어려운 가정 형편의 아이들에게 보내지 못해 못내 섭섭하지만 그래도 주변에 나눔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꼭 아이들이 아니면 어떠랴. 할아버지의 선한 영향력을 조금이나마 실천하는 것 같아 기쁘다. 202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