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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란 무엇인가?

산마을 풍경 2020. 11. 27. 18:15

옮긴 글인데 글쓴이 이름이 없어서 아쉽네요. ~

소설이란 무엇인가

1. 소설의 정의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시대와 사회, 그리고 논자들의 문학관에 따라 달리 표현되어 왔을 만큼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포스터(E. M. Forster)는 "소설이라는 것은 방대한 덩어리이며, 정해진 형태가 없는 문학의 습지 중의 하나"라고 지적한다. 또한 루카치(Gyorgy Lukacs)는 "다른 장르가 완성된 형식 안에서 쉬고 있는 성격과는 달리, 진행 중에 있기 때문에 예술적으로 가장 크게 위험에 처해 있다는 이유로 소설을 반예술(半藝術, Halbkunst)"로 규정한다.

이처럼 확실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 소설이라는 문학장르이다. 그러나 소설의 개념에 대한 물음은 소설 문학의 토대를 세우기 위해 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본질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처럼 모호하고 때로는 단편적이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사실 그동안의 소설에 대한 연구는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없이도 소설을 읽고 즐긴다. 마치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확고한 신념 없이도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소설(Novel)의 출발은 근대 시민사회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서구의 시대적 상황은 프랑스 혁명에서 볼 수 있듯 개인주의, 자연주의, 평등주의가 성행하던 시대였다. 소설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는 다양한 시대를 거치면서 그 가치와 의의를 점차 확보하게 되었다.

소설이 오늘날 서사문학의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이나 개념에 대한 시각도 다양하다. 현대적 개념으로서의 소설은 18세기 이후에나 가능했었던 것이지만, 그 이전에도 소설은 다른 형식과 개념으로 존재했었던 것이다.

1) 동양의 정의
동양에서의 소설에 대한 관점은 부정적이었다. 도덕과 윤리의 사색에 몰입했던 동양의 현인들은 도덕적 덕목을 해치는 유해한 것으로 소설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사서삼경과 같은 근엄하고 진중한 글들을 의미하는 대설(大說)의 반대개념인 소설(小說)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소설(小說)이라는 자의에서도 부정적 견해를 엿볼 수 있다.

동양에서 소설이란 말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기록은 『장자(壯子)』의 <외물편(外物篇)>이다. 장자는 "소설을 꾸며서 현(縣)의 수령(守令)의 마음에 들려 하는 자는 크게 되기 어렵다.(飾小說以于縣其於大達亦道矣)"고 하여 소설을 상대방에게 환심을 사려는 재담 정도로 여기고 있다.

물론 <외물편>에서 말하는 소설의 의미는 오늘날의 소설과는 다른 소견(小見)과 같은 것이지만,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공자(孔子)는 소설이란 말 대신 소도(小道)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군자에게는 맞지 않는 괴력난신(怪力亂神)적인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반고(班固)는 『한서(漢書)』의 <예문지>에서 "소설가라는 것은 대개 패관(稗官) 출신들이며, 소설이란 길거리에 떠도는 이야기와 골목에서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꾸며서 만들어진 것이다.(小說家者流蓋出於稗官, 街談巷語道聽塗說者之 所造也)"고 하면서 소설을 쓰는 것은 작은 재주에 불과하므로 군자로서는 할 짓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제자(諸子)를 유가(儒家), 도가(道家) 등 10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소설가를 맨 마지막에 넣고는 이 중 볼 만한 것은 소설가를 제외한 나머지를 구가(九家)라고 하였다.

소설이 대체로 음란하고 황당한 이야기라는 견해는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이란 말이 최초로 보이는 것은 이규보의 <백운소설>이다. 이 책의 정확한 내용은 알 수가 없고 시화(詩話)를 포함한 잡록(雜錄)으로 꾸며졌으리라는 추측만을 할 뿐이다. 이때의 소설이란 용어는 이야기와 허구성을 중시하는 오늘날과는 다른 잡록(雜錄)을 총칭하는 개념이었다. 대체로 소설은 음란하고 황당한 이야기 정도로 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가치가 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동양의 소설관은 많은 시간을 경과한 끝에 인간의 삶에 관한 가치 있는 표현양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2) 서양의 정의
소설이 변변치 못한 이야기에 불과한 의미 없는 것으로 인식한 점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을 흔히 'story', 'short―story'라고 하는데, 이 단어에서도 가벼운 이야기를 의미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무엘 존슨(S. Johnson)이 "소설은 대체로 연애를 우습고 재미있게 쓴 이야기"라고 말한 것이나, 아베 웨트(Abbe Wet)가 "소설이란 독자에게 기쁨과 교훈을 주기 위하여 기교를 부려서 쓴 연애 모험담의 픽션"이라는 주장은 소설의 핵심이 재미있는 내용과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는 위의 내용을 담은 작품과 중세에 발달한 기사들의 무용담이나 연애 이야기를 포함하여 로망스(romance)라고 일컬었다. 로망스의 내용 대부분은 환상적이고 모험적인 신기한 이야기이며, 마법사나 마녀가 등장하여 이야기의 대부분을 이끌어 나간다.

르네상스 이후 영국에서는 소설을 노블(novel)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새롭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 'novellus'와 이탈리아어 'novella'에서 온 것이다. 노벨라의 내용은 중세에 인기가 있었던 간결하고 사실적인 담화와 <데카메론>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사실을 기초로 한 일반 대중들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리이브(C. Reeve)는 소설과 일어날 수도 없는 사건을 묘사한 로망스를 구분하면서 "소설은 실생활과 풍습, 그리고 그것이 쓰여진 시대의 그림이다."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제임스(H. James)는 "소설이란 생활에 대한 인상, 즉 직접적인 체험의 단계"라고 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소설이 단순히 이야기를 통한 흥미의 추구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것으로 보려는 태도가 들어 있다.
중세를 풍미했던 로망스와 현대적 의미의 노블은 현격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로망스가 옛날 이야기, 불가능한 공상적인 이야기인 반면, 노블은 일반 대중들의 현실과 그들의 행동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개연성의 법칙에 기초를 둔 이야기라는 점이다. 18세기에 이르러 노블로의 변화가 가능해지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탐구라는 소설관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소설은 19세기 들어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대량 보급되면서 커다란 진전을 보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전보다 객관적으로 인간의 삶을 탐구하고 사회의 구조를 담아내려는 변화가 요청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영국에서는 소설을 픽션(fic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소설이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포스터(E. M. Forster)가 "소설은 적당한 길이의 산문으로 된 가공적인 이야기"라고 말한 것이나, 브룩스(C. Brooks)와 워렌(R. P. Warren)이 "소설은 이야기, 즉 캐릭터에 대해서 꾸며놓은 이야기"라는 견해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소설에 대한 정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시대적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의 형식과 내용은 여러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던 것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많은 연구가 축적된 현재에도 소설에 대한 정의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웨인 C. 부드(Booth)는 "어떠한 비평의 언어라 하더라도 소설의 총체를 포괄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소설에 대한 정의는 소설을 즐기고 창작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고 다양하다. 그것은 소설이 발생한 이후 시대나 사회에 따라 소설이 지닌 다양한 의미에서 어느 한 면을 강조하는 경향에서 온 결과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소설의 정체를 가리켜 제멋대로 커져 버린 한 마리의 거대한 공룡과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소설의 개념은 떠도는 이야기·연애·모험담 등에서 비롯된 '이야기'의 뜻에서 차츰 인생의 표현이나 인간성의 탐구니 하는 의의가 붙여지고, 그후 적당한 길이의 산문으로 된 가공(fiction)의 이야기로 변화해 온 장르라 하겠다.

2. 소설의 특성
1) 허구(虛構, fiction)
소설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있을 수 있는' 가상의 것을 '그럴듯하게 꾸민' 허구라는 통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뿌리 깊게 박혀 있다. 희곡을 비롯한 다른 문학 장르들도 허구적 요소들이 있으나, 소설의 경우는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까닭이다.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나 사실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창조되는 것이다. 그 결과 때때로 '가치 없는 이야기'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의 세계는 개연성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이다. 허구는 현실을 전제로 하여 무한한 가능성의 현실, 현실의 환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허구로서의 소설은 보편성과 개연성을 바탕으로 실재하지 않는 인물이나 사건을 구체적인 인물의 실재하는 이야기인 것처럼 그럴듯하게 꾸며내고, 그것을 사실보다 더 참되고 생생하게 형상화한다. 따라서 소설에서의 허구는 현실 세계의 재창조이며 소설을 소설답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다.
허구로서의 소설은 흔히 역사와 비교하여 설명된다. 역사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인 '있었던 일'(what was)을 기록하는 데 반해, 소설은 '있음직한 일'(what might be)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역사는 있었던 일의 기록인 까닭에 그와 똑같은 사건이 재발할 수 없는 일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있음직한 일들을 서술하는 소설은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다. 역사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소설은 상상력에 근거를 두는 차이가 있지만, 현실의 다양한 양태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소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서술하거나 현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미있고 그럴듯하게 꾸며진 이야기다.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꾸미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개연성(probablity)과 필연성(necessity)이다. 우리는 소설의 세계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읽고 공감하고 감동을 받기도 한다. 월러스 스티븐슨(Wallace Stevens)은 "최종적인 믿음은 허구를 허구라고 알면서도 믿는 일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허구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믿는다는 건 기막힌 진실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믿음은 소설의 세계가 개연성과 필연성의 바탕 위에서 꾸며졌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른바 신비로운 꿈의 문학양식이었던 서양의 로망스나 동양의 전기소설(傳奇小說)은 개연성보다는 리얼리티가 무시된 우연성의 남발이 눈에 띤다. 가령 「춘향전」에서 춘향이가 죽음을 당하기 직전에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나타나는 것은 극적 반전의 효과는 있을지언정 리얼리티는 찾기 어렵다. 즉 현실감을 획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설은 개연성을 바탕으로 서술됨으로써 리얼리티를 얻게 되는 것이다.


허구의 개념을 정확하게 인식한 것은 근대소설에 들어서라고 할 수 있다. 로망스의 작가들은 현실적으로 발생하기 어려운 일을 이야기로 꾸미는 것을 허구의 개념으로 파악하였다. 그들은 비현실적인 공상이나 환상을 허구의 의미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근대 리얼리즘 이후 작가들에게서의 허구는 이야기의 구체성과 진실성을 확보해 주는 중요한 원동력으로써의 상상력을 의미하였다. 그들은 작품에 박진감과 현실감을 불어넣기 위한 방법으로써 허구의 개념을 생각했던 것이다. 구인환은 『문학개론』에서 허구는 작가의 주관과 상상력의 작용에 의하여 새로운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간다는 뜻이며, 소설은 리얼리즘과 반리얼리즘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창조적인 허구의 세계이며, '리얼리즘도 선택이다'라는 말 속에는 현실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작가에 의하여 창조된 환상(illusion)의 세계요, 가공(架空)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조남현은 『소설원론』에서 허구라는 개념은 소설(노벨)이 자리 잡히기 시작하면서 '현실감을 보다 효과 있게 전달하기 위한 구성 방법'이라는 방향으로 조정되었으며, 현실감이란 '사실의 재생'이라는 뜻 이외에 '진리와 진실의 전달'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허구를 '사실 이상의 사실'과 '진실'을 무엇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가공의 장치로 본 것이다.

예로 든 논자들의 견해에서 알 수 있듯 소설에서의 허구란 문학적 진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이다. 소설은 현상에 드러난 사실만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배후에 숨어 있는 진실을 탐구한다. 위대한 소설은 반드시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는데, 그 이유는 고글(R. H. Gogle)의 말처럼 "가장 위대한 소설가는 분명히 진실을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낡은 장애를 깨뜨림으로써 참된 진실에 도달하려고 열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에서의 리얼리티는 작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소설의 세계를 형성하는 기본적인 질서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 소설에서 리얼리티 즉, 진실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논자들의 관점이나 세계관 또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르다. 브룩스와 워렌은 리얼리티를 "경험의 충실성을 표현하도록 하는 일상적이고,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세부 묘사"라고 하면서, 사실적이라는 용어를 낭만적이라는 것과 대립시켰다. 댄지거(M. K. Danziger)와 존슨(W. S. Johnson)은 리얼리즘을 테크닉의 문제로 귀결시키고, 그것의 목적은 일상적인 목표에 얽매인 중류층이나 하층 계급의 전형적인 인물 제시와 인물의 행위를 세심하고 구체적으로 자세히 묘사함으로써 일상적인 생활의 확실한 삶의 그림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고 하였다.
결국 소설에서의 허구는 현실적으로 발생하기 어려운 일을 이야기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현실을 한층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진실의 세계를 구축하는 가공의 장치라 하겠다.
■2) 현실의 모방(mimesis)


소설의 또 다른 특성으로 지적되는 것이 '현실을 그럴듯하게 모방한다'는 미메시스(mimesis) 이론이다. 미메시스는 고대 그리스의 말로서 '흉내내기', '본뜨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문학에서의 모방의 의미는 대상을 그대로 모사(模寫), 복사(複寫)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존재 이치와 원리를 찾아내어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럴듯하게 재현한다는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하였다. 문학을 모방 행위로 본 것은 플라톤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는 문학을 부정하였다. 플라톤은 실제 또는 진리는 오직 순수한 이성의 작용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 나머지 문인이나 화가의 존재를 무시하였다. 그의 생각에 시인들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현실세계를 다시 한번 모방하는 자들이므로 진리가 이상인 이데아의 세계에서는 불필요하다고 하여 시인추방론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순수이성을 구사하여 진리에 이르는 철학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기도 하였다. 플라톤은 모방을 저급하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실과 사물만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이 모방하는 대상은 이데아가 아니라 우리 인생 그 자체라고 하면서 그를 비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의 모방 대상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 행위의 보편적 양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는 개연성의 논리를 제시하였다. 이것이 문학은 인생의 보편적 진실, 즉 개연성을 모방한다는 미메시스 이론이다. 문학은 대상을 재현하고 재구성하는 창조적 모방으로 개연성 있는 현실과 삶을 기술함으로써 인생의 보편적 진실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은 현실을 사실대로가 아니라 그럴듯하게 모방한다. 문학에서 대상을 재현하거나 재생한다는 것은 베끼기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모든 문학작품은 쓰고자 하는 대상에 대하여 작가의 주관과 상상력이 어느 정도는 작용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고 한다. 우리가 눈으로 직접 목격한 실제의 호랑이는 무섭지만 작가에 의해 그려진 호랑이를 보는 것은 즐겁다. 또한 죽은 사람의 형상을 직접 볼 때는 무서움과 두려움의 공포를 느낄 수 있으나, 작자에 의해 묘사된 시체의 모습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에 의해 그려진 호랑이나 묘사된 시체는 본래의 모습이 아닌 모방을 통해 재현된 것이다.
위와 같이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비롯된 미메시스 이론은 그후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이어졌다. 신고전주의 시대에는 인생을 사실 그대로 보여준다는 재현 또는 반영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19세기 리얼리즘 시대에 들어서 미메시스는 소설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태도요 소설창작의 중심적인 요소로 인식된다. 미메시스 이론은 문학사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리얼리즘 이론으로 변형되었던 것이다.
리얼리즘의 정신은 미메시스 이론을 통해서 구체화될 수 있다고 본 아우에르바흐(Erich Auerbach)는 인간들의 일상사를 정직하게 다룸으로써 리얼리즘 정신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는 리얼리즘을 "일상적인 직업과 사회계급(상인, 기술자, 농민, 노예 등), 일상적인 장면과 장소(가정, 가게, 밭, 창고 등), 일상적인 관습 및 제도(아이들, 일, 밥벌이 등), 그리고 서민과 그들의 삶을 문학적으로 심각하게 다루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인간 삶의 일상성 혹은 일상사를 주요 관심 대상으로 본 것이다. 리얼리즘 소설은 사물의 내면에 대한 깊은 회의와 불신에서 비롯되었지만, 아우에르바흐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 문학은 현실을 모방한다는 미메시스 정신을 이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은 모든 문학 양식 가운데 사회적 성격이 가장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소설의 궁극적인 관심이 인간 그 자체이며, 이들 상호간의 관계란 결국 사회적 존재로서의 의미가 전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삶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면서 리얼리즘은 모든 문학이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방법이며 정신이 되었다.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리얼리즘의 정신이란 대상을 재구성하고 선택하여 표현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작품이 대상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여서는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도외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리얼리즘의 의미는 현대에 들어서는 명확하지 않다. 작가들은 저마다의 다른 방법과 시각으로 리얼리즘을 파악하고 표현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리얼리즘 소설의 경계설정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3) 인간의 탐구와 삶의 표현
소설은 총체적으로 인간을 탐구하고 인생의 삶을 표현하며 인간의 경험 세계를 확대하면서 진실한 인간형을 추구한다. 소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 앞에서 이야기한 현실의 모방이라는 미메시스의 이론으로 볼 때는 사회의 문제가 소설의 주 대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인생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적 의미이지 주제로 볼 수는 없다. 제임스 조이스(J. Joyce)나 이상의 작품 같은 현대 심리소설은 인간 자체의 탐구보다는 인간을 간섭하고 속박하는 사회적 부조리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탐구에 다름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인간은 어떤 모습과 반응을 나타내는가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소설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다룬다 해도 핵심은 우주의 중심인 사람이다. "문학이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인생의 표현", "소설은 인생의 해석", "소설가의 주제는 곧 인생"이라고 말한 허드슨(W. H. Hudson)의 견해나, "소설은 증류된 인생"이라고 말한 해밀턴(Hamilton)의 주장에서 소설의 주된 관심이 사람의 삶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소설이 다양한 인생의 표현을 통하여 추구하는 것은 삶의 의미를 정리해 주고 정화시켜 주는 것이다. 「보물섬」의 저자인 스티븐슨은 "소설은 우리 인생을 좁은 세계로부터 해방시켜서 억지로라도 다른 사람과 친한 벗이 되게 한다. 또 소설은 우리 인간의 핵심이 되고 있는 기괴한 에고이즘을 소멸시켜 실로 이상스러운 변화를 가져다가 세로와 가로로 짜여진 천과 같은 경험을 보여준다."라고 하였으며, 팜포드는 "소설은 우리 인생을 평범하고 저속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보다도 더 크고 넓은 곳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의 높이보다도 위대한 마음의 세계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는 소설에서의 인물들을 통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 '진실한 인간의 삶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이해를 확충해야 하는 것이다. 소설이 궁극적으로 묘사하고 표현하고 창조하려는 것은 바로 인생이며, 그것을 통해 더욱 나은 인생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모리악(F. Mauriac)은 소설가를 "모든 인간 속에서 가장 신을 닮았다. 그는 신을 모방하는 자다. 그는 살아 있는 인간을 창조하고, 운명을 구명(究明)하고 사건과 재앙을 쌓아 올리고, 그것을 뒤섞고, 종국에로 인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소설가는 신과 같이 우리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해석하고 창조한다. 현대소설의 전조였던 서사시나 로망스는 영웅, 기사 등이 펼치는 스토리 중심이었지만, 근대소설 이후에는 인물묘사, 성격창조, 심리표현 등이 주요한 특성이 되고 있다.
결국 소설은 다양한 인간의 삶을 통해 인생을 해석하여 더욱 나은 인간상을 제시한다. 그리고 다양한 삶의 양태와 현재의 내 삶과의 비교를 통해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인생을 의미 있게 심화하는 것이다. 창작의 방법론과 내용을 달리하는 작가들일지라도 그들의 궁극적인 관심은 인간의 가치 있는 삶에 대한 탐색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