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마을 詩情 산책/아름다운연(戀 愛)시

오래된 여인숙에서

산마을 풍경 2020. 9. 1. 15:16

오래된 여인숙에서

 

송경동

 

 

사랑을 잃고

가을바람에 날리는 거리의 검정 비닐처럼

길을 헤매다

하루 저녁

어느 낯선, 외등 하얀, 오래된 여인숙 명부에

가늘어진 이름 석 자

다소곳이 적어보지 않은 이는 모른다

생수 한 병 요쿠르트 하나 수건 한 장 받아들고 들어가

깨진 벽 유리처럼 구겨진 커튼처럼

녹슨 창살처럼 벽지무늬가 다른 네 벽처럼

우두커니 섰다가, 한순간 무너져

때 탄 이불보로 입막고

흐느껴보지 않은 이는 모른다

씨팔년 더러운 년 나쁜 년 치사한 년 퉤퉤 하며

마지막 자위를 해보지 않은 이는 모른다

삶이 왜 잠깐

들렸다 가는 여인숙처럼 미련 없는 것이어야 하는지를

세상이 왜 아무도 가져갈 것 없이 다만

잠시 쉬었다 가는 여인숙 같은 것이어야 하는지를

왜 또 저 하늘에는 저렇듯 많은 정거장들이 빛나고 있는지를

비루한 여인숙

가끔은 어느 절간이나 성당보다

더 갸륵하고 평온한

내 영혼의 안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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