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休 心 停<휴심정>/세계문화유산탐방

세계문화유산(377) 그리스- 로도스 중세 도시

산마을 풍경 2019. 10. 18. 16:47

세계문화유산(377)/ 그리스


로도스 중세 도시(Medieval City of Rhodes; 1988)



 



 



 



 



 



 



 



 



 



 



 



 



 



 



 



 



 



 



 



 



 



 



 



 



 

   남부 에게 지역[Region of the South Aegean] 도데카네스 주[Prefecture of Dodecanese]에 위치한 로도스는 1309~1523년에 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The Order of St John; 병원 기사단이라고도 함]이 점령해 요새화한 이후 터키와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기사단장의 궁전[Palace of the Grand Masters]?대병원?기사의 거리 등이 있는 어퍼타운(Upper Town)은 고딕 건축물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로어타운(Lower Town)에는 오스만 제국 시절의 모스크?대중목욕탕?고딕 건축 등이 있다.


   십자군 전쟁 동안 창립되었던 성 요한 기사단이 로도스에서 머물렀을 때, 기사단은 언제 점령당할지 모른다는 극단의 공포 속에서도 도시를 요새화하였다. 로도스 섬의 요새는 오랫동안 난공불락의 ‘프랑크 도시(Frankish)’로 알려지면서 중세 말기에 동지중해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프랑크 식 건물과 오토만 제국 시절의 건물이 함께 들어서 있는 로도스의 옛 시가지는 역사적 지속성과 문화적 복합성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전통 주거 복합체이다. 로도스 옛 시가지의 고딕 건축 양식은 도데카네스(Dodecanese) 제도의 전통 문화를 만나 변화되었고, 1523년 이후에 오스만 제국의 장식적 요소가 더해지면서 두 문화의 만남이 이루어 낸 이 지역 특유의 건축 양식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912년 이전에 형성된 대부분의 건축 요소들은 실제 생활이 변화하면서 훼손될 위험에 놓여 있다. 따라서 이곳의 종교적?군사적 기념물과 민간 기념물은 물론이고, 교회?수도원?모스크?대중목욕탕?성채?성문?성벽들을 보호에 힘써야 한다. 1309년부터 1523년까지 로도스를 점유했던 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은 1291년에 무슬림에 의해 팔레스타인에 있던 그들의 마지막 요새[아크레]가 함락되자 로도스 섬에 기사단의 근거지를 세웠다. 1444년 이집트 술탄의 침공, 1480년 메메트(Mehmet) 2세의 침공 등 강력한 공격이 있었지만 기사단은 이에 저항하면서 섬의 중심지를 요새화한 도시로 만들었다. 그러나 로도스는 1522년 1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 슐레이만 2세(Suleiman II)의 침공에 6개월에 걸친 전투 끝에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 중세 도시는 4㎞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고전적 양식에 따라 구역이 나뉘어 있는데 북쪽에는 어퍼타운, 남서쪽에는 로어타운이 있다. 원래 요새화된 성벽으로 인해 도시와 떨어져 있던 높은 지역 마을[콜라키움; Collachium]은 대부분 요한 기사단이 지은 것이다. 요한 기사단은 1312년 템플 기사단이 해체된 후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 기사단이었다. 기사단은 7개의 텅(Tongues; 방언을 중심으로 하는 기사단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각의 텅은 그들의 진지가 있었다. 아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프로방스의 텅을 위한 진지는 동서축의 양쪽으로 있었는데 이곳은 유명한 기사의 거리로 고딕 양식의 도시 건축물이 있다. 북쪽으로 약간 떨어져 기사단의 첫 번째 병원 자리에 가까운 곳에는 오베르뉴의 진지가 있으며, 이곳의 앞면은 1512~1513년에 기사단장이었던 기 드 블랑셰포르(Guy de Blanchefort)의 무기로 장식되어 있다. 최초의 병원은 15세기에 ‘대병원’으로 대치되었는데 1440~1489년에 지은 이 건물은 기사의 거리 남쪽 편에 있다. 오늘날 이곳은 고고학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콜라키움의 북서쪽에는 기사단장의 궁전과 성 요한 교회가 있다. 기사의 거리의 동쪽 끝 벽을 마주하는 곳에는 기사단이 15세기에 성당으로 재건한 세인트 메리 교회가 있다. 도시의 아래쪽 역시 콜라키움과 같은 유적들로 가득 차 있으며, 1522년에 5,000명의 인구가 살던 이곳에는 교회와 비잔틴 건물들이 즐비하다. 1523년 이후에는 대부분의 주요 건축물이 솔리만(Soliman), 카바클리 메스치티(Kavakli Mestchiti), 데미를리 드자미(Demirli Djami), 페이알 에드 딘 드자미(Peial ed Din Djami), 압둘 드제릴 드자미(Abdul Djelil Djami), 돌라플리 메스치티(Dolapli Mestchiti)와 같은 모스크로 바뀌었다. 남동쪽 지역에도 법원, 대주교 궁전, 성 카트린 병원 등의 구호 기관들이 들어섰다. 중세 도시의 성벽은 비잔틴 제국 시절의 방벽 위에 세워졌고, 14~16세기에 기사단장 조반니 바티스타 데글리 오르시니(Giovanni Battista degli Orsini; 1467~1476)?피에르 도뷔송(Pierre d'Aubusson; 1476~1505)?에메리 당부아즈(Aimery d'Amboise; 1505~1512)?파브리지오 델 카레토(Fabrizio del Carretto; 1513~1521)에 의해 지속적으로 보수되었다. 포대는 이후에 마지막으로 추가되었다. 16세기 초인 1512년에 북서쪽을 향해 세운 앙부아즈 성문[Amboise Gate]의 경우 장막벽의 두께가 12m였으며, 4m 높이의 총구가 뚫려 있는 난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