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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촛점에 대하여/황동규

산마을 풍경 2019. 10. 8. 19:57

시의 초점에 대하여
/황동규

1958년 {현대문학}에 [즐거운 편지]와 [시월]이 추천이 되어 시단에 나왔으니, 올해로 데뷔 42

년이 됩니다. 그 동안 작품을 써오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면서 느낀 것은 문학

작품은 그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인간이 자기가 체험한 것을 형상화시킨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렇기 때문에 인간이 뭐냐는 물음 앞에서, 문학은 어느 장르보다도 더 답을 잘할 수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체험을 형상화시켰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날 문학이 상당히 위축된 상태처럼 보이지만 문학은 사실 굉장히 유용한 겁니다. 미국

의 서부개척을 가리켜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게 되면 인디언

학살입니다. 콜럼버스가 미 대륙에 상륙했을 때, 아메리카 대륙에는 약 700만 명의 인디언이 살

고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오늘날 미국 전역에 살고 있는 인디언들의 숫자가 30만이라고 합니다.

다른 종족들은 수십 배 혹은 100배 늘었는데 인디언만이 줄어든 셈입니다. 그나마 보호 지역에

갇혀 있습니다. 미국에 가 인디언들을 만나 보면 많은 사람들이 알코올 중독에다 니코틴 중독자

로 지내는 등 형편없습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치학자나 경제학자, 사회학자들은 대부분 아메리칸 드림을 찬양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름을 아는 미국의 시인·작가 치고 그 미국의 꿈에 찬사를 보낸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체험을 형상화시킨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인간의 삶의 진실을 알기 때문에, '이것은 아니구나' 생각한 겁니다. 체험의 형상화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참 약한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 견해로는 체험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시나 소설에서 멀어져서는, 인류가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넓은 의미에서 경제학자나 사회학자, 정치학자보다 문학하는 사람들이 윤리적으로 상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체험을 형상화하고 구체적인 삶을 보고 추상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체험을 육화한 문학만이 역사의 진실을 본다

그런데 체험의 형상화가 의미를 가지려면 주어진 전통에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문학을

할 때아무 작품도 읽지 않고 처음부터 문학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문학을 시작하고 시를

읽고 시를 쓴다고 할 때에는 벌써 여러분에게는 주어진 전통이 있습니다. 그 전통을 변화시켜야

됩니다.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재미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달래꽃]이나 [님의

침묵]의 전통에서 제가 [즐거운 편지]를 쓸 때는 전통의 새로운 변화를 가한 겁니다. 다음으로

사회 현실에 대한 체험도 중요합니다. 체험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회 현실에서 멀

어진 약간 도피적인 소설이나 시를 쓰지 않는가 하고 여러분은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중요한 체험입니다. 그리고 체험 속에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죽음과의 대화도 들어갑니다.
가장 중요한 체험의 하나는 인간이 변하는 체험입니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거듭나는 체험입니

다. 불교적으로 이해하면 깨닫는 체험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체험

인데, 독자들 대리 체험을 통해서 변화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체험은 종교적이거나 이데올로기같이 엄청난 체험이 아니라 비록 규모는 적지만 한 인간이 새사람이 되는

체험입니다. 그런데 체험은 무질서합니다. 규칙적이거나 시나리오가 있으면 체험이 아닙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형상화시키려면 초점(焦點)이 주어져야 합니다. 초점은 남과 달리 보

는 시선이 초점이 됩니다. 먼저 제 시 [즐거운 편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

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 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

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

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즐거운 편지] 전문

물론 연애시입니다. 사실 고백을 하자면 고3 때 연상의 여자를 사랑하던 때 쓴 시입니다. 제가

이 시를 쓸 때까지 제가 받은 연애시의 전통은 김소월의 [진달래꽃] 과 한용운의 [님의 침묵]입

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이걸 보면 애인은 자기를 버리고 가고 자기는 남아 있는 시입니다. 그리고 애인이 자기의 삶을

 생각해서 '가시난 닷 도셔오쇼서'입니다. 고려 가요 [가시리]에 깃든 '가시 도셔 오쇼셔(가시

자 마자 돌아오십시오)'가 제가 시를 쓰기 전까지 제게 주어진 전통입니다. 미당(未堂)도 연애

시에서는 '아, 내 기다림은 끝다.'라고 노래하는데, 이것도 '가시 도셔 오쇼셔'입니다. 한용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님은 갔습니다. 나는 님을 보내지않았습니다.'라고 노래했는데, 돌아오라

는 얘기가 아니겠어요. 제가 시를 쓸 무렵은 환도(還都)해서 몇 년 되지 않은 삭막한 상황이었

고 불란서에서 건너온 사르트르류의 실존주의가 유행하던 때였습니다. 나는 그때 고등학교 학

생으로서 실존주의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실존(實存)이 본질(本質)에 선행한다'는 내용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실존주의적인 분위기만은 감수성에 와 닿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

랑도 본질적으로 결정된 사랑은 없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도 늘 새롭게 만들어 가야 되

는 것이고, 늘 선택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인간의 먼 후일과 마찬가지로 끝이 있을 수 있

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있는 동물이나 식물은 말할 것도없고, 생명이 있는 모든 현

상에는 끝이 있습니다. 그 생각이 이 속에 들어간 겁니다.
'그래서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이다'의 '반드시'까지 들어가야 상당히 강조된 것

인데, 이건 그때까지 우리 나라의 연애시에 없던 겁니다. 새로운 각도에서 두 사람이 일생 동안

서로 사랑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사랑은 늘 새롭게 만들어져 가야 되는 것이지, 한번 주어 

사랑의 본질 때문에 일생을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이 시의 주절입니다. 1번은

역설이고 반어법입니다만, 넓은 의미에서 1번은 '가시 도셔 오쇼셔'에서 멀지 않습니다. 2번에

가서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세상은 그대로 내 사랑이 끝

났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지요. 그걸다 인정을 하고 그 조건 속에서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끝날 수 있다는 조건 속에서. 이런 것이 이 시의 초점이 되고 이 시가 내가

받은 전통을 그대로 돌려주지 않고 내 이루지 못할 사랑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연상의 여자

를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 이루지 못할 사랑의 체험 속에서 제가 발견한 겁니다. 이 시

의 가치가 있다면 전통에 처음으로 변화를 준 겁니다.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조그만 사랑 노래] 전문

그때까지는 우리 나라의 연애시는 '님은,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고 노래부르는 사람은 남아 있

는' 것이전부였습니다. 이 시만 해도 그 전통을 얼마간 깨뜨린 겁니다. 둘 다 움직이는 겁니다.

추운 세상에서는보금자리를 얻지 못하고 둘 다 따로따로 만나지 못하고 날아다니는 두 눈송이

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은' 것은 과거가 다 추억으로 되는 편지를 받았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

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

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길이니까 돌이 상당히 자연스럽지만 사실은

내 시대를 산 사람은 이 구절이 여러분보다는 훨씬 더 절실했을 겁니다. 제 어린 시절에는 태평

양전쟁 탓으로, 인형 같은 걸 갖고 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 어렸을 때에는 돌을 가지고 많이

살았습니다. 돌 가지고 땅 뺏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가난한 편에 속하지 않는데도 인형이 없었

습니다. 그리고 가방도 끈으로 맨 가방을 메고 다녔습니다. 아주 가난한 때였는데 그때는 정말

어린 시절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

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라는 구절에서 보듯 둘 다이 세상에 자리를 잡을 수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남아있고 한 사람이 떠나는 게 아니라 둘다 떠다니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

것도 아마 제가 우리 나라 연애시에 조그맣지만 플러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멎지 않은
몇 편(篇)의 바람
저녁 한끼에 내리는
젖은 눈, 혹은 채 내리지 않고
공중에서 녹아 한없이 달려오는
물방울, 그대 문득 손을 펼칠 때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며
그대를 스치는 물방울.
-[더 조그만 사랑 노래]

이 시에서는 애인은 그 자리에 있고 내가 움직이지요. 그런데 애인을 만나지 못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다가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듯이 그대를 만나지 못하고 스치기만 하는, 어떻게 보면 제가 받은 [가시리]나 [진달래꽃]이라든가 [님의 침묵]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지

요. 가시리나 진달래꽃이나 님의 침묵과 반대되는 상황을 그리겠다고 쓴 건 아닙니다.
그런데 뭔가 부족감이 들어 목말라서 쓴 거니까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게 된 겁니다. 처음부터 기획을 하고 쓴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쓴 지가 30년 정도 되는데 그때 일을 정확히 기억

을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때까지 받았던 연애시의 전통을 바꾼 것만은 사실입니다. 아직

멎지 않은 몇 편의 바람, 겨울날 바람이 불게 되면 마른 낙엽, 더러워진 낙엽을 휙 쓸고 가다가

멎고 그러잖아요. 그것 하나하나가 짤막한 소설처럼 보인 겁니다. 몇 편의 바람이 멋을 부릴려

고 한 게 아니라 그 당시 서울이 아직도 비었을 때 겨울날 바람 부는 것을 직접 보고 형상화시킨 겁니다.

가을 들면서 잔 비가 뿌려도
무지개가 제대로 떠지지 않았습니다.
저녁 안개 가끔 낄 뿐
햇빛 속에서도
보이지 않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모르는 새 마음이 조금씩 식더군요.
지하철에서 석간을 읽고
읽던 기사 좌석에 놓은 채 일어서
마을버스를 타고 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꽃가게의 꽃들이 풀죽어 웃고 있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사람 살려!))
-[비린 사랑 노래 . 6]

옛날의 이 상황이 연애시를 확대시킨 것인데 아무 일도 없다는 것에 안심하는 생활 아닙니까.

사람 살려 하는 삶 자체가 워낙 억눌린 게 많기 때문에 괄호를 두 개나 친 겁니다. 여러분이 혹

시 자기 삶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고 아, 이렇게 사는 게 삶이 아니로구나 하고 생각하더라도 여

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은괄호 두 개 속의 '사람 살려'밖에 안 되지 않는 것 아닌가 하고 내 체험을

형상화시킨 겁니다. 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서 여러분이 자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

자는 게 아니고, '어떻게 살아'라고 하면 쉬울 수도 있고 여러분을 어처구니없는 곳으로 이끌 수

도 있습니다. 자각을 해야지요. 이게 여러분이 무사 무사하고 아무 일도 없고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하는 것이 사실은 사람 살리는 상황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용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기항지 1]

나는 자유의 상징을 찾아서 항구에 갔는데 가보니 항구에 배들이 바다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머리가항구를 들여다보고 있는 겁니다. 나중에 안 것은 모든 배들이 정박할 때 머리를 항구 쪽으로 하고 정박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떠날 때 뒷걸음질쳐 나와서 갑니다. 배들이 자유를 향해서 바다로 나갈 생각을 안하고 항구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항구에도 탈출의

기회가 없었던 겁니다. 탈출의공간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도 하늘을 보니까 새들이 자유롭게

날고 있었다는 조금 절망적인 시였습니다. 여러분이 미국에 가던 영국에 가던 어디에 가던 여러

분을 막는 삶의 행위가 있는 겁니다. 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항지와 같은 체험을 할지

도 모릅니다. 특별히 운이 좋고 재능이 있는 몇 사람을 빼놓고서는 거의 숙명적인 한계입니다.

뉴욕에 간다고 해결이 될 것도 아니고 런던에 간다고 해결될 것도 아닙니다. 시대가 달라졌지만

내용은 그대로입니다. 가정이 여러분을 얽매는 장소가 될 수도 있고때로는 우정이 여러분을 얽

맬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걸어서 항구에 도착한 적이 많았습니다. 예전에는 웬만한 항구는

버스가 지나가다가 내려줍니다. 여수와 목포와 같이 중요한 두 도시를 연결하는 버스가 하루에

두 대나 있었을까 하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긴 눈 내리듯 낮게 비치는 불빛은 제가 여행을하면

서 체득을 한 것입니다. 불빛이 낮아지게 되면 눈이나 비가 내리게 되는 겁니다. 체험의 형상화

기때문에 구체적으로 들어간 겁니다.
여러분, 소설이나 시에서 가장 나쁜 것은 추상적인 겁니다. 추상적인 것은 체험하고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나쁜 겁니다. 소설이나 시를 쓸 때 구체적으로 써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체험

이 묻어 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봐야 좋은 시나 소설이 되지 않습니다. 아까 말

했듯이 죽는 체험을 현상화할 수 없습니다. 죽은 다음에 형상화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분

이 사는 동안에 죽음과의 대화는 해야 합니다. 누구나 겪어야 되는 일이니까 대화를 하지 않으

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기 자신의 죽음을 설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슨무슨 일

을 하다고 죽겠다고 말입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죽어도 좋다. 또 어떤 사람의 죽음을 아름답

다는 것을 여러분이 설계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삶의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최근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조금 인생관에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자다가 죽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부친께서 잠들다가 돌아가시니까 유언

도 없고 임종도 못하고 몇 시에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참 허망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2, 3

일 정도 앓다가죽는 게 좋겠다고 바뀌었습니다.
죽음을 통해 보면 삶이 더 절실해져[풍장 27]은 죽음과의 대화인데 왜 이 시를 썼는가 하면 죽

음을 통해서 삶을 보면 삶이 더 절실해지고 간절해집니다. 우리 삶에서 삶을 보면 평범해집니

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죽음을 통해서 삶을 보게 되면 얼마나 삶이 생생해지고 삶답고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그리기 위해서 쓴 것이지 내 풍장은 죽음을 위한 시가 아니고 삶을 위한 시

입니다. 단 죽음을 한번 통해서 보자는 겁니다.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풍장 27]

가을날 비 맞는 소리가 오동나무는 잎이 크니까 너무 둔탁하지요. 우리가 후박나무라고 하는 일

본 목련에 떨어지는 가을비 소리가 처량하기도 하고 마음을 깊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면 참 살

고싶은 생각이듭니다. 귀를 남기고 가겠다는 말은 비 맞는 가을나무의 소리가 있는 한 죽지 못

하겠다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여기가 이 시의 초점입니다.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

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는 가을비 오

는 소리가 참 좋게 되면 뭔가 약한 가을을 어깨를 부축해서 데리고 오는 것 같아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상당히 약하고 나이 드는 사람을 보호해 주는 것 같아요.
하지만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듣고도 가을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두 귀는 두고 가리. 저 소리가 있고 저 나무가 있

고 저 비가 있는한 죽지 못하겠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이 시의 초점입니다.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는 구체적이지요. 나의 체험에서 얻은 겁니다. 그냥 추상적으로 그린 게 아닙니다. 나는 예

술은 문학뿐만 아니고 음악이나 미술도 구체적이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추상도 구체적으로

그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마크 로스코라는 미국의 화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러시아 출신으로 뉴욕에 와서 예순

일곱까지 살다가 죽었는데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자마자 목을 메어 자살한 사람입니다. 아마 돈이 싫어

서 죽은 게 아니라 더 이상 그릴 게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고생만 하고 죽었어요. 그 사람의 그림
을 보게 되면 일생을 사변형 두 개를 아래위로 배치하는 게 일생의 일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위에 두 개
가 있지만, 이 두 개를 배치할 때 두 개 사이에 수평선이나 지평선이 얼마나 신비롭고 얼마나 종교적이
고 얼마나 깊은지 사람의 마음을 녹여놓습니다. 자기 체험을 그 선 속에 넣는 거지요. 적당히 생각하는
게 아니라 추상화도 구체적이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변화는 체험을 형상화시켜라

물론 그 사람도 사변형 배치를 자기 혼자서 한 것이라기보다는 말레비치라는 자기 선배가 있었습니다. 
말레비치는 화폭 속에 사각형 하나를 배치했습니다. 그걸 두 개로 배치한 겁니다. 두 개로 배치를 하니
까 나는 말레비치보다는 훨씬 더 다양스러워지고 사변형과 사변형 사이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의 추상화를 볼 때는 추상화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그 체험의 형상학 가운데 가

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인간이 변하는 체험을 형상화시킨 것이 가장 중요한 형상학 중의 하나일 것이다

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미자 한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分子)가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
매일 색깔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게 떫고 맑은 맛!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전화 걸기 전에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오미자 술]

처음부터 오미자 한 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이게 모두 구체적입니다. 오미자를 소

주와 함께 병에 넣고 그러면 맛이 떨어집니다. 어떻게 보면 큰 문제는 아니지만 하나의 시인이 자기가

살았던 세상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자기 애인의 얼굴이나 표정을 마음 속에 간직하는 것도

사랑의 표시인 것처럼 이 세상에서 내가 언젠가 보해소주 25도가 아니고 30도를 만났을 때 참 즐거웠습

니다. 왜냐하면 술이 강해야 잘되니까.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

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가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

경. 매일 색깔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

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게 떫고 맑은맛!
오미자 술을 만들면 이처럼 이뿐 색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두달 반 가량 기다리는 동안에 내 마음이 순

화되는 겁니다. 그리고 한 잔 마실 때 맑고 떫은맛은 기막힙니다. 홍도라는 친구와 한번 싸우고 야단칠

일이 있는데 전화를 걸어서 내일 만나자고 해놓고서는 한 잔 마셔보고는 마음이 환해졌어요. 그러고 나

서는 에라, 용서를 하자고 변해 버린 겁니다. 그 변하는 체험을 형상화시킨 것입니다. 이 시에는 초점이

따로 없지만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 게 초점이겠

지요. 부서지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화가 나는 일이 큰 일이 되겠습니까. 그것을 형상화한 겁니다. 여러

분이 살다 보면 시 쓸 게 많습니다.
이 시도 거듭나는 시입니다. 오미자 술처럼 조금 긴 게 흠이지만 지금부터 15년 전에 쓴 것 같습니다.

그때는 지하수를 떠다 먹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마침 친구 하나가 김포에

있는 대벽면에 조그만 농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2주에 한 번씩 물길러 가는 얘기입니다.

1.
그대 농장의 지하수.
김포 수안산 머리에서 흘러내려
가슴 부근의 나무뿌리와 풀뿌리를 적시고 배를 타고 하체로 내려와
그대 농장 마당 지하에 고인 물,
그 맛에 길들어,
혼자 김포 들을 질러 달려왔다.
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양곡을 지나자
벌써 하얀 나라
하늘도 하얗다.
멋모르고 도로에 들어온 개를 간신히 피한다.
조심히 차를 몰아
수안산 남녘 자락에 눈 맞고 서 있는 하얀 정자를
눈발 가늘어진 하얀빛 속에서 확인하고
차를 왼편으로 돌려 올라가
눈 맞아 뻑뻑한 자물쇠를 연다.
2
지하수 전기 펌프까지 가는 길을 처음 낸다.
찍히는 발자국!
신기해서 차 있는 데로 돌아왔다가
다시 걸어본다.
잠시 그친 눈에
농장은 온통 진주(珍珠)
담장까지 넘실대고 있다.
발자국을 찍기 위해 여기저기 걸어본다.
이것 봐라.
나는 발가락 하나하나의 무게까지 섬세하게 찍혀 있는
새 발자국을 좇고 있군.
저 샌가, 저 앞 어린 은행나무로 날아가는.
검은 베레모에 갈색 코트,
저 새 이름, 되새?
두 눈으로 새를 좇으며 걷다가
여름내 채소 자라던 자리에
벌렁 뒤로 한번 넘어졌다
눈 위에 큰 대(大)자를 찍었다.
일부러 또 하나 찍었다.
다섯 개나 찍었다.
허전한 자리에
하나 더 찍었다
내일쯤 눈 위에 큰대(大)자 암호 보거든
그대 농장에서 한 시간쯤 살다 간
외계인의 자취임을 알아다오.
3
농장 빠져나오자마자
베이지색 개 하나를 만난다.
평범하지만 편안한 개.
천천히 그가 길을 건너는 걸
차를 세우고 기다린다.
왼쪽 귀 끝에 검은색 암호!
그가 살짝 꼬리를 흔든다.
-[외계인 1]
김포 대벽농장 주인 김정웅에게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된 겁니다. 아까는 이 개 같은 놈, 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개가 지나가는 걸 차를 세
우고 천천히 그 특징을 살펴볼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으로 바뀐 겁니다. 사실 있던 얘기입니다. 처음
에 가서 한번 넘어지니까 기분 나쁜데 눈 위에 큰 대자를 그려본 적이 어렸을 적 말고는 없는 것 같은

데, 하도 신기해서 여러 개 찍고 그랬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게 되면 외계인이 놀다간 자리로 생각하

겠구나 후배친구한테 마음속으로 외계인으로 생각을 해달라. 그런 경험을 얻고 나니까 아까와는 약간

의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겁니다. 크게 다른 건 아니고 약간 다른 건데 사실은 삶을 사는데 있어서는

이데올로기나 종교처럼 큰 게 아니라 인간들이 조그맣게 변하는 게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그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도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와 종교는 인간을 미리 정해진 식으로 사람을 사랑하게 되지요. 인간이 자기 체험
속에서 변화시킨 대로 사랑을 못하기 때문에 조그만 변화가 사실은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변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흑반(黑斑) 잔뜩 끼어 죽어가는 난 잎 어루만지며
베란다 밖을 살핀다.
저녁 비가 눈으로 바뀌고 있다.
주차장에 누군가 차 미등 켜논 채 들어갔나,
오른쪽 등 껍질이 깨졌는지
두 등 색이 다르다.
안경을 한번 벗었다 다시 낀다.
눈발이 한번 가렸다가
다시 빨갛고 허연 등을 켜놓는다.
난 잎을 어루만지며 주인이 나오기 전에
배터리 닳지 말라고 속삭인다.
다시 만날 때까지는 온기를 잃지 말라고
다시 만날 때까지는
눈감지 말라고
치운 세상에 간신히 켜든 불씨를
아주 끄지 말라고
이 세상에 함께 살아 있는 그 무엇의.
난이 점차 뜨거워진다.
-[퇴원 날 저녁]

제가 차를 산 게 늦으니까 차의 미등(尾燈)을 켜놓고 들어간 걸 보면, '저 사람 내일 아침에 바테리 때문
에 혼나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수술을 하고 난이 죽어가니까 간절해지는 겁니다. 배터

리도 일종의 생명인데 죽지 말았으면 하고, 죽어가는 난을 안은 채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이 이 시의 초

점입니다.
체험이 중요한 겁니다. 저는 이비인후과 수술을 받고 퇴원해서도, 얼마나 심하게 앓았는지 입이 비뚤어
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재입원을 했습니다. 눈이 나빠지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날 재 보았더니 더 나빠졌습니다. 의사의 얼굴이 새파래지더군요. 참 좋은 의사라서, 자신이 수술하다가 혹시 신경을 건드렸는

지도 모르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의사는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한 잠도 못

잤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의사가 싱글벙글 들어오더니 '기계가 고장났었다'고 하는 걸 보고,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하여간 그 당시의 체험을 담은 시입니다.

왜 갈 곳 널린 공주에서
굳이 마당 한 뼘으로 남은 백제 절 터에 들리자 했는지,
몇 차례나 길을 물어 그곳에 갔는지.
4년 전 멋모르고 들렀던 대통사(大通寺) 터
갑사 것보다 더 크고 실한 당간지주
(여기에 당간을 달면
꼭대기에선
싱싱한 금강 줄기와 푸른 차령산맥이 한눈에 들었으리)
그 지주를 만나려 간 것이 아니라,
소루쟁이풀 듬성듬성 서있는 마당을 두른
검은 돌 흰 돌 가지런히 박은 담장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냥 철책 뒤에 한 줄로 아무렇게 땅에 박혀 있는
저 우람한 주춧돌들,
섬세한 백제가 굵은 기둥을 통채로 찍은 자리 패인
저 주춧돌들!
섬세한 삶의 다른 뽄새를 한번 더 맛보기 위해,
구 시가지 한 구석에 숨어 밖을 내다보려 않는
소루쟁이들 곁에 가서...
-[공주 대통사 터]
동행한 양애경 김백겸 김순선에게

가보면 알지만 대통사 터의 주춧돌이 상당히 우람합니다. 사각형으로 기둥을 세웠던 자리가 있는데, 나
는 불에 콱 찍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백제 예술품들은 참 섬세한데 대통사 터는 꽤 우람하더군요. 대

통사 터에서 나온 확 비슷한 유물이 공주박물관에 두 개나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걸 겁니다. 이를 통해서 보아, 백제의 예술은 섬세하기도 하지만 스케일이 크고 강인한 구석도 있음을 알 수 있습

니다. 그것을 보기 위해 4년쯤 전에 그곳을 찾았습니다.
당간지주 등 보물급의 유물들도 있지만, 세인들의 눈에는 평범하게 보일 뿐인 주춧돌 몇 개가 좋아서

그곳을 찾았습니다. 물론 이 시의 초점은 '섬세한 백제가 굵은 기둥을 통채로 찍은 자리 패인'입니다.

물론 돌을 쪼아 만들었겠지만, 제 상상으로는 백제답지 않으니까 나무를 꽝 찍어 만들었다고 본 거죠.

저 만 쌍의 눈을 뜨고 깜빡이는 남해 바다
이처럼 한눈에 들어올 줄은 몰랐다.
입구의 어두운 동백들 때문일까,
청담(靑潭)이 살다 관뒀다는 기호(記號), 사리탑에서 내려다보면
언젠가 시력(視力) 끊겨도 몇 년은 계속 보일
저 환한 자란만(紫蘭灣), 떠도는 저 배들 저 부푼 구름들 저 잔 물결들
자세히 보면 자란섬 뒤로
나비섬 누운섬, 떠다니는 섬들도 있다.
청담 스님이 슬쩍 자리를 비워준다 해도
감을래야 감을 수 없는 이곳에 눈을 파묻지는 않으리.
뒤에 문득 기척 있어
동백이 떨어진다.
동백 뒤에 청담이 나오면 청담을…
바다로 해가 뛰어들고
섬들의 겨드랑이가 온통 빛에 젖는다.
-[무이산(武夷山) 문수암]
-박태일에게

사리탑은 한 사람이 죽었다는 기호입니다. 청담 스님의 사리탑이 거기 있습니다. 아마도 청담의 사리가

묻혀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 서니까, 언젠가 내 시력이 없어져도 몇 년간을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

습니다. 그만큼 환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사리탑 속에 들어 있는 청담이 나와서, 저더러 "앞으로

는 당신이 여기 와 계세요" 즉 죽은 다음에 묻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다 하더라도 그 아름

다움 속에서 '감을래야 감을 수 없는 이곳에 눈을 파묻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아름다운

경치 앞에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시의 초점은 '청담 스님이 슬쩍 자리를 비워준다 해도/감을래야 감을 수 없는 이곳에 눈을 파묻지는
않으리'입니다. 아마 이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고, 이곳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하는 바

일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죽을 수가 없다' 즉 눈을 감을 수 없게 만드는 곳에서 죽을 수 없다

는 거지요. 그래서 '뒤에 문득 기척 있어/동백이 떨어진다./동백 뒤에 청담이 나오면 청담을 죽이

고…'가 원칙일 것입니다. [임제록]에 보면 '부모를 죽이면 부모를 죽이고 조상을 만나면 조상을 죽이

고'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그렇지만 '동백 뒤에 청담이 나오면 청담을 죽이고' 하게 되면 초점이 흐려지

기 때문에, 일부러 빼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초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앞뒤의 명암을 죽여야 하는 거죠.

명암의 광도, 음의 광도를 죽여야 합니다. '…청담을 죽이고'로 쓰게 되면 '감을래야 감을 수 없는…'이

 약해집니다.

시를 형상화함에 즈음하여서는 초점을 주어야 하는데, 그 초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앞 뒤 언어의 명암,

농도를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예술은 그 첫 출발이 형상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학이나 정치학, 사회학처럼 세계를 뒤흔드는 학
문보다 인간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위대한 문학은 인간의 나쁜 행위의 편을 든 적

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학문보다 위엄성은 적을지 모르지만 인간적으로 위에 있고 도덕적으로 위

에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데올로기나 종교의 형상화가 아니라 삶의 형상화이기 때문입니

다. 단 형상화를 적용시키려면 삶 자체가 조직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초점을 부여해야 되고, 그 초점을

살리려면 앞뒤의 명도를 줄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