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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도는 조리돌림

산마을 풍경 2019. 9. 15. 10:12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조리돌림은 여러 사람 앞에서 죄인을 끌고 다니며 망신을 주는 형벌이다. 회시(回示)라고도 하는데, 돌려보인다는 말이다. 조리돌림의 기원은 고대 중국의 기시형(棄市刑)으로 보인다. 저잣거리에서 집행하는 공개 처형이다. 굳이 많은 사람이 오가는 저잣거리에서 죄인을 처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기> 왕제에 “저잣거리에서 사람을 처형하여 여러 사람과 함께 버린다”라고 했다. 공동체 구성원의 합의에 따라 형벌을 집행한다는 점을 천명하기 위해서다. 다른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죄인에게는 수치심을 주고, 대중에게는 경각심을 준다. 분노한 대중에게 분풀이할 기회를 제공하는 기능도 빠뜨릴 수 없다.

[역사와 현실]돌고 도는 조리돌림

조리돌림은 조선의 법정 형벌이기도 하다. 1397년 편찬된 법전 <경제육전>에 “큰 악행을 저지른 향리는 형벌을 집행한 뒤 조리돌림한다”라는 조항이 있다. 향리를 조리돌림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지방 토착세력에게 국가권력의 우위를 과시하기 위한 조처로 추정된다. 이 조항에 의거하여 죄인을 조리돌림에 처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종종 보인다.

1447년 세종은 돌연 조리돌림을 금지하고, 죄상을 자세히 적어 경향 각지에 보내 알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법적 근거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지만, 능지처참에 처하는 중죄인까지도 조리돌림을 금지한 점으로 미루어 미약하나마 인권의식의 발로가 아니었나 싶다. 이후 조리돌림은 군법 위반자에 한해 집행되었다. 일벌백계로 엄정한 군율을 유지하기 위한 조처다.

조선시대 군대의 조리돌림 절차는 조현명(1690~1752)의 <귀록집>에 자세하다. 먼저 죄인의 얼굴에 재를 바르고 화살로 귀를 뚫는다. 귀 뚫기 역시 고대 중국에서 비롯된 형벌인데, 사형수가 아니면 상투에 화살을 꽂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런 다음 북을 등에 짊어지게 하고 여러 사람에게 돌려보인다. 북은 이목을 끌기 위한 도구다. 북을 두드리며 여기 죄인이 있으니 와서 구경하라고 친절히 알려주는 것이다.

군법 위반자를 제외한 죄인을 조리돌림에 처한다는 조항은 조선시대 법전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민간인은 조리돌림으로부터 자유로웠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조선 후기까지도 국가의 지배력은 제한적이었다. 지역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토착세력의 협조가 필요했다. 토착세력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조리돌림을 제재 수단으로 활용했다. 국가의 형벌권을 침해하지 않는 수준이라면 국가에서도 적당히 눈감아 주었다. 조선시대의 조리돌림은 법적 근거가 없는 사형(私刑), 즉 린치에 가까웠다.

지방 수령과 향촌사족이 조리돌림을 자행한 기록은 드물지 않다. 1868년 강원도 고성군수는 투기한 여인을 발가벗겨 조리돌림했다가 조정에 알려지는 바람에 경고를 받았다(<승정원일기>). 전북 고부의 사족 김유관(1705~1753)은 죽은 남편의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재가한 여인을 조리돌림하고 마을에서 쫓아냈다(<박성원문집>). 구한말 의병장 민용호(1869~1922)는 평안도 지역의 풍속 쇄신을 위해 각 면의 유력자에게 조리돌림할 권한을 주었다(<관동창의록>). 조리돌림을 남용한 결과, 남의 밭에 들어가 보리를 벤 좀도둑을 조리돌림에 처하는 사태도 벌어졌다(<봉서일기>). 김윤보의 ‘형정도첩’,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 등 구한말 풍속화에도 북을 등에 지고 조리돌림당하는 죄인이 등장한다. 조리돌림은 구한말까지도 계속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리돌림이 가장 성행한 곳은 지식인의 산실이자 학문의 전당인 성균관이었다. 성균관 유생이 잘못을 저지르면 다른 유생들이 북을 두드리며 조롱하고 비난하면서 교문 밖으로 쫓아냈다. ‘명고지법(鳴鼓之法)’이라고 한다. 큰 잘못을 저지른 자가 있으면 “북을 두드리며 성토해도 좋다”는 <논어>의 구절이 그 근거다. 하여간 배우신 분들이라 그런지 핑계도 점잖다. 성균관 유생들은 공자님 말씀을 명분으로 내세워 조리돌림을 벌이곤 했다(<논어고금주>).

무슨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러서 그러는 게 아니다. 성균관의 조리돌림은 대개 당파 싸움에서 비롯되었다. 성균관을 장악한 세력의 당론을 거스르면 여지없이 조리돌림을 당했다. 지방의 향교에서도 빈번히 벌어진 일이다. 공동체의 합의라는 본래의 취지는 사라지고, 조리돌림은 당쟁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이러니 당하는 쪽도 순순히 당할 리 없다. 북을 뺏고 뺏기는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권력의 향배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맞바뀌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어제는 북을 두드리며 성토하던 자가 오늘은 치욕스럽게 끌려다녔다. 

               

현대판 조리돌림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인사청문회다. 이번 법무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는 당사자와 가족의 행적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조리돌림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너무 억울해할 것은 없다. 한때 북(페이스북)을 두드리며 지난 정권 인사들의 조리돌림에 앞장섰던 그가 아닌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청문회장에서 그를 공격하던 의원들도 역풍을 맞아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다. 내 편은 무조건 옹호하고 상대편은 무조건 비난하는 진영논리가 지배하는 한, 조리돌림의 악순환은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