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의 호랑이' 김동삼, 독립운동단체들 통합하다

1933년 가을 경성형무소(해방 후 '마포형무소'로 이름이 바뀐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되어 이 곳으로 압송된 일송 김동삼은 한 장의 가족사진을 받았다.
그가 가족의 안부와 새로 출생한 손자에 대해 애정이 담긴 편지를 보내자, 만주에 있는 가족들이 사진관에 가서 가족사진을 찍어 보낸 것이다.
면회를 가고 싶어도 여비가 없어 갈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는 김동삼의 부인, 아들 형제 내외와 딸, 큰 아들이 낳은 삼남매와 둘째 아들이 낳은 딸 등 10명의 그리운 얼굴이 담겨 있었다.
사진을 쓰다듬던 김동삼은 상념에 젖었다.
"만주에서 가족들 얼굴을 본 게 몇 번이었나?"

그래도 시어머니보다는 많이 본 셈이었다.
시어머니는 큰 아들이 결혼한 다음 해에 남편을 한 번 보고는 영원히 상면하지 못했다.
이해동이 결혼하고 다음해 봄, 농사준비를 하고 있는데 저녁에 김동삼이 아무 기별없이 찾아왔다.
이해동이 시아버지를 본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가족들과 사흘 밤을 보낸 김동삼은 큰 며느리를 따로 불렀다.
이해동의 살림 솜씨를 칭찬하면서 "어린 시동생 두명이 커서 성가할 때까지 맏며느리로 고생을 참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는 사가지고 온 세루치맛감 두 벌과 지폐 50원을 건넸다.
이 돈은 시아버지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하기 직전 전보가 왔을 때, 두 아들이 경성으로 가는 노자돈으로 쓰인다.

시어머니에게는 마지막 상면이었다.
이해동이 두번째로 시아버지를 본 것은 5년 후 첫 아이로 아들을 순산했을 때였다.
시아버지가 첫 손자를 봤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시아버지는 손자 이름을 오래오래 살라는 뜻으로 장생이라고 지었다.
첫 손자를 보고 좋아하던 김동삼은 이튿날 아침에 떠났다.
시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31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서였다.
김동삼이 이해동의 친정아버지인 이원일과 함께 북만주에 갔다가 하얼빈에서 일본 영사관의 형사들에게 체포된 것이다.
김동삼의 아들 형제 내외와 조카 내외, 이미 아홉살이 된 딸 등 7명이 일본 영사관으로 면회를 갔다.
족쇄를 끌고 면회실로 온 김동삼은 유치장에서 얼마나 고초를 당했는지 피골이 상접했다.
그는 정기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왜 울기만 하는 거냐? 시간이 없으니 이야기라도 해야지"라고 말했다.
김동삼은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둘째 며느리와 조카 며느리한테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거친 큰 손으로 처음 보는 딸의 손을 어루만지며, 오랫동안 딸을 지켜보았다.
시아버지와의 마지막 상면은 이렇게 끝났다.
◈ 일송 김동삼, 일가와 제자들을 인솔해 만주로 떠나다

더 이상 국내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 기지를 만들고, 독립군을 키운 뒤 국내진공을 감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김동삼의 일가와 제자 등 30여 명은 1911년 1월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이회영, 이상룡 일가 등과 합류해 조선인들의 자치정부 역할을 맡을 한족회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이어 김동삼은 신흥학교 졸업생들 385명을 규합해 통화현 팔리초 깊은 산 속에 들어가, 농사도 짓고 군사훈련을 실시할 백서농장을 세웠다.
3.1운동이 발생하자 백서농장 군영을 서로군정서로 개편한 뒤 참모장으로 취임해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을 벌였다.
이 군대가 북로군정서와 연합해 청산리에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게 된다.

각고 끝에 1922년 6월 남만주 지역의 한인사회와 독립군 통합을 이뤄내 대한통의부를 결성했다.
그는 통의부 총장에 추대됐다.
1923년 1월부터 6월 사이에 상해에서는 일제시대에 단 한 번밖에 없었던 역사적인 회의가 열렸다.
만주와 러시아, 중국 본토, 국내와 미주 등 국내외의 모든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 40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진행했다.
이 회의에서는 그때까지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소련정부가 준 자금 등-를 논의하고 앞으로의 독립운동 노선과 방안 등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의장은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를 대표해서 온 김동삼이, 부의장은 미주 독립운동을 대표한 안창호와 러시아를 대표한 윤해가 맡았다.
김동삼이 의장에 선출된 것은 그가 독립운동사에서 갖는 위상을 보여준다.
이렇게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통합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절, 1931년 일본군이 갑작스럽게 만주를 침공했다.
김동삼은 모종의 임무를 띠고 사돈인 이원일과 함께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동지인 정인호 집에 영사관 형사들이 들이닥쳐 체포되고 만다.
◈ 모진 고문을 받고 경성으로 압송돼 경성형무소에서 순국하다

김동삼은 국내로 압송되어 신의주법원에서 10년형의 판결을 받고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형무소에서도 김동삼은 가혹한 징벌에 대항해 여러 차례 단식투쟁을 벌였다.
마포형무소에서 함께 옥고를 치룬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김철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외부와 연락하다가 발각되어 지독한 '징벌'을 당하면 김동삼을 중심으로 단식으로 맞섰다. 간수들이 기진맥진한 죄수들을 끌어내 단식을 그만두라고 통사정을 하면 한결같이 중죄수이기 때문에 용수를 쓰고 있는 김동삼을 가리키면서 저 분의 처분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형무소장이 와서 김동삼한테 사죄를 해야 단식이 끝났다"

병석에 있는 동안 유언을 남겼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나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그때 가족은 모두 만주에 있었고,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시국이라 친지 중에 누구 하나 나서서 시신을 염습할 이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만해 한용운이 나섰다.
만해는 일송의 시신을 수습하여 당신이 거처했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 옮겨 장사를 치렀다.
이는 만해가 만주 망명 시절에 김동삼 선생을 만나 뵙고 받은 인품에 대한 감명과 독립투사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국내 유지들이 모두들 심우장에 운집했다. 정인보, 홍벽초, 김병로, 이인 씨 등 수백 명이 다녀갔다. 만해 선생은 일송 김동삼 선생의 영구를 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만해 선생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김동삼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한 뒤 한강에 뿌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광복 60주년을 기념하여 2005년 6월에 김동삼 선생을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한편 만주에 남은 김동삼의 가족들은 해방 후에도 만주에 남았다.

6살에 고향을 떠나 83세가 되어서야 돌아온 것이다.
꼬박 77년이 걸린 것이다.
그녀는 그 고단했던 여정을 <만주생활 77년>이란 책으로 엮었다.
이 저서에서 이해동 여사는 김동삼 선생도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했지만 시어머니의 역할도 컸다고 회고했다.
"처음 만주에 갔을 때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와 싸우는 것으로 첫 고생이 시작됐습니다. 친정 할머니께서 '고놈의 날씨~ 왜놈들보다 더 독하다'고 말씀하시던 일이 기억납니다. 평생 불평 한마디 없이 말없이 참고, 침묵으로 살아온 시어머님의 일생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아버지 일송 김동삼 선생께서 직업혁명가로 평생을 국권 회복을 위해 공을 세웠다면 그 속에는 시어머니 몫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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