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休 心 停<휴심정>/감동글·좋은글

귀천 시인 천상병

산마을 풍경 2019. 2. 4. 12:14



귀천 (歸天) 시인 천상병

천상병은 일찍이 마산중학교에서 당시 자기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와 꽃이 되었다라는 국어선생이던 김춘수 시인에게서 시를 배웠다. 재학 중인 1949'죽순(竹筍)'이란 잡지에 시를 발표하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다니던 중 '현대문학'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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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무관하던 그가 뜻밖에도 1967'동 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여섯 달 옥고를 치르고 나왔다. 그 후부터 의정부 수락산 밑에서 살았다. 그리고 인사동에서 벗들에게 1000원을 얻어 막걸리 한잔 마시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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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영양실조로 쓰러진 뒤에 무연고자로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입원을 하였는데. 행려병자로 병원에 누워있으니, 다들 몇 달째 코빼기도 내밀지 않고 소식이 끊긴 천상병이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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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불쌍한 천상병을 위해 유고 시집이나 묶어주자고 갸륵한 뜻을 내었다. 그래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시집 새'가 나왔다. 이런 미담이 신문에 실리자 한 병원에서 '천상병 시인이 여기에 있다'는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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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들이 비단 보자기에 호화 양장본으로 꾸민 그 시집 10권을 싸 들고 서울시립정신병원으로 병문안을 갔다. '유고 시집'을 보고 나서 천상병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천상병의 카랑카랑한 제일성이 " 내 인세는 어찌 되었노? "였다. 돈 알기를 돌로 보는 그 아닌가? 미처 인세 생각을 못 했던 문우들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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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저승 가는 길에도 노자가 들면 어떻게 하노? 하고 걱정하던 시인 이었다. 커피 한 잔과 갑 속의 두둑한 담배, 막걸리 한 병을 마시고도 아직 버스 요금이 남았다며 행복해 하던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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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소유였지만 가난과 불행에 주눅 들지 않고 늘 늠름했다. 오히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하고 시 '귀천(歸天)'을 썼다. 시인의 긍정주의 낙관론은 많은 것을 거머쥐고도 불행감에 허덕이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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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歸天) 천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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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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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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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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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좋아한 천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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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이었다. 하루는 교수님 집에서, 화장대에 멋있는 병이 있어서 양주인 줄 알고 마셨다. 이상하다. 무슨 향이야? 역시 좋은 술은 향기부터 다르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향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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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임종은 자정에 오라던 김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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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남 시인 김관식은 선배 시인의 처재를 보고 첫 눈에 반해 자살소동 끝에 원로 시인 서정주와 동서지간이 되었다. 천상병은 절친한 친구인 김관식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하루는 김관식을 골탕 먹이고 술도 사먹을 돈도 벌 겸, 친구 집에 있던 오래된 책 한권을 몰래 헌책방에 팔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김관식이 이를 눈치 채고, 천상병이 훔친 책에서 몰래 봉투를 빼내고, 대신에 헌 신문지를 넣어두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책을 팔러 갔던 천상병은 망신을 당하고 돌아왔다. 김관식은 이 광경을 보고 배꼽을 잡다가 도리어 술을 대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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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값은 세금아라고 강변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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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생전에 세금(?)으로 지인으로부터 500, 1000원씩을 받아냈다. 징수(?) 원칙은, 어른은 1000, 어른이 아니면 500원을 받았다. 기준은 결혼 여부였다. 천상병이 친한 사람이 아니면 돈을 걷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친한 그에게 돈을 주면서도 기분이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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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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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젊었을 때였다. 폐인 모습으로 살고 있던 천상병 시인은, 머리가 덥수룩하여 얼굴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를 딱하게 여기던 친구가 그냥 돈을 주면 술을 사 먹을까봐 천상병을 데리고 이발소로 갔다. 거기서 돈를 지불하고 머리카락을 자르는 걸 본 친구는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친구가 나가자마자 천상병은 이발사에게 지금까지 이발한 비용을 제외하고 환불해달라고 요구했다. 어이가 없는 이발사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결국에는 환불을 해주었다. 천상병은 그 돈으로 술을 사먹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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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작가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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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동무로 절친한 사이였던 시인 신경림의 회고에 따르면, 천상병은 먹성이 좋고 주량도 엄청났던 모양이다. 또한 몸이 튼튼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험하게 살았어도, "속이 무쇠로 되어있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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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이 영어학원 강사로 근근히 살아가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워한 천상병은 취직을 시켜주겠다면서 여기 저기 알아보고 일자리 알선도 해 주었다. 일정한 수입이 없는 천상병이 제 걱정은 안 하고 남 걱정만 하는 것을 보고는 우스워서 한마디 했더니, 천상병은 "너와 나는 타고난 생리가 다르다"라는 말로 일축했다고 한다. 즉 자신은 남들보다 시를 잘 쓰니 자기 힘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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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님의 시 한편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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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幸福)합니다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幸福)합니다.

아내가 돈을 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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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 오십세살이니

부지런한 게 싫어지고

그저 드러누워서

KBS 1FM방송의

고전음악을 듣는 것이

최고(最高)의 즐거움이오.

그래서 행복(幸福)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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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젼의 희극(喜劇)을 보면

되려 화가 나니

무슨 지랑병()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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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그저

웃어야 하는데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어기겠어요?

행복은 충족입니다.

나 이상

만족한 사람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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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베를린 사건으로 국사범에 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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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이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된 죄명은 친구 강빈구로부터 공갈을 쳐서 36500원을 갈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친구에게 술값으로 백 원, 오백 원씩 받아서 썼던 돈이었다. 그일 때문에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몰린 것이다. 취조를 받을 때 그의 별명은 '천희갑'이었다고 한다. 얼굴이 당시의 희극 배우 김희갑을 닮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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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임신을?

천상병이 간이 부어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 병원장은 그와 친구였다. 병원장이 배에 복수가 차서 누워있는 시인에게, 배가 왜 이렇게 부르냐고 묻자 그는 임신을 했다고 하니 개도 웃을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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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 갈림길에 포장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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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인 목순옥 여사는 인사동에서 귀천이라는 다방을 운영하였다. 당시 '귀천'에 자주 다니던 사람이 천상병 시인에게, 빌린 돈을 언제 갚으실 거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허허, 내가 죽으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을 테니, 오거든 갚을 만큼, 공짜로 술을 주겠네." 이 이야기는 일본인이 쓴 세계 유명인의 명언이란 책자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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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와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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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 소설가 이외수가 문병을 왔다. 그때 초면인데도 보자마자, 너 외수 아니냐? 넌 이제부터 내 동생이다.

이외수의 회고에 따르면, 평소에 천상병 시인을 존경하여 직접 만나보고 싶었으나, 정작 그런 기회가 나지 않았는데 뒤늦게 병문안을 가서 뜬금없는 환대를 받자 무척 감격했다며, 이후에 자주 만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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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가 물었다. 중광 형님 나이가 몇이래요? 그러자 천상병 시인이 희죽 웃으며, 외수 너! 서른 살이지? 아니야 예순 하나야! 중광이는 마흔이고. 그러자 외수는. 상병 형님 나이는 요? 나는 세 살이네! 때가 뭍은 해수로 본다면 맞는 말이다. 천 시인의 해맑은 웃음을 보면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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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의 간절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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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 부인 목순옥 여사가 천상병 시인을 5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놀랍게도 병원에서조차 가망이 없다던 그의 병은 완쾌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정확히 5년 후인 1993년 거짓말같이 세상을 떠났다.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 목순옥 여사는 "5년이 아니라 10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빌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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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 한옥마을에 이외수 중광 천상병 세 분의 육필 원고와 작품을 모아놓은 문학관이 있다. 아라(亞羅) 김명성은 생전 시인과 이후 목여사와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았던 만남이었다며 이를 시로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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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스러지는 노을

답장도 없는 편지라면

나는 사랑이라는 여비

남기고간 아내랍니다.

그대가 또다시 새벽이

왔노라고 우기신다면

저는 그제서야 가난한

첫날밤을 세고 있답니다.

그는 두 분이 신혼여행도 못간 안타까운 사연과 함께 대표작인 노을편지’, ‘사랑을 엮어, 부인의 영전에 바쳤다. 이 자리에서 가수 최백호는 이 시를 꼭 노래로 만들어 부르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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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문단에서는 목 여사는 참 외롭게 한 시대를 살다 간 분입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어린왕자 천 시인과 이승에서 못다 한 행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 간 것입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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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애완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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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무척 좋아하여 개와 함께한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날 때 기르던 개도 슬퍼하며 주인이 자주 앉던 서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3년 뒤에 주인을 따라 하늘로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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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금이 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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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소풍을 끝내고 받은 몇 백만 원의 조의금은 살아생전에 만져본 적이 없는 큰돈이었다. 장모는 제일 안전한 곳인 아궁이에 감추어 두었는데 그런 사실을 모르고 아내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재로 만들었다. 반을 은행의 배려로 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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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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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장례식의 압권은 영혼을 울리는 타고난 소리꾼 장사익의 공연이었다. 무반주로 천상병 시인의 대표시 <귀천>을 노래로 불렀는데. 우리 고유의 가락과 가요의 애잔한 정서를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장사익의 소리는 조문객들로부터 앵콜 요청을 3번씩이나 받았다. 그 때마다 다시 영전에 나와 노래로 선물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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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앵콜 요청으로 다시 무대에 올라와서는 망부가를 부르고 나서, 예의 수줍은 충청도 사투리로 "고마워유..아무리 세상이 힘들어도 이래서 살맛나는 거예유-"하자 관객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장지는 의정부시립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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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난은 / 천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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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 값이 남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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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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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햇빛에는 예금통장이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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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수풀로

때론 와서 괴로웠지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바람아! 불어라 씽씽 허주 01/20

.

후배 시인 장석주에게 천상병 시인의 영전에 올릴 弔辭를 부탁하자 극구 사양하면서 이런 구절을 보내왔다고 한다.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두 분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