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마을 詩情 산책/내가 사랑하는 詩

무언가 부족한 저녁 /나희덕

산마을 풍경 2017. 5. 8. 12:19

무언가 부족한 저녁

 

 

나희덕

 

 

여기에 앉아보고 저기에 앉아본다

컵에 물을 따르기도 하고 술을 따르기도 한다

 

누구와 있든 어디에 있든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저녁이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이 마음에 드는 저녁이다

 

저녁에 대한 이 욕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교차로에서, 시장에서, 골몰길에서, 도서관에서, 동물원에서

오래오래 서 있고 싶은 저녁이다

 

빛이 들어왔으면,

좀더 빛이 들어왔으면, 그러나

남아 있는 음지만이 선명해지는 저녁이다

 

간절한 허기를 지닌다 한들

너무 밝은 자유는 허락받지 못한 영혼들이

파닥거리며 모여드는 저녁이다

 

시멘트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검은 나방들,

나방들이 날아오를 때마다

눅눅한 날개 아래 붉은 겨드랑이가 보이는 저녁이다

 

무언가, 아직 오지 않은 것,

덤불 속에서 낮선 열매가 익어가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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