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 재미 /신경림
시를 읽는 재미 / 신경림
오늘 강연 제목을 '시를 읽는 재미'라고 붙였지만 사실 요즘 사람들이 시를 읽는 것이 너무
재미없다고 해서 역설적으로 붙인 제목입니다. 오늘 아침 경향신문 책 소개란을 봤더니 한
기자가 걱정을 했어요.
'요즘 시집 얘기를 하는 사람도 없고 시를 읽었다는 사람도 없다. 시집이라는 게 한권에 5천원
밖에 안하는 커피 한잔 값인데 왜 이리 인색한가. 시를 읽고 시집을 좀 사주자.'
이런 글을 보고나서 '시를 읽는 재미'라는 강연을 한다는 게 참 비참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시를 읽는 게 재미 없죠? 심지어 시를 읽는 것이 재미없고 신경질나게 한다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시가 옛날보다 영향력을 잃은 것은 틀림없습니다. 시가 30년전, 50년전보다 사람들에게 덜
읽히고 그만큼 영향력을 미치지도 않습니다. 무슨 사이버 시대가 되고 매체가 다양화되다 보니
사람들이 영상매체에 이끌리지, 활자매체에는 이끌리지 않는 복잡한 환경 때문이라는 핑계를
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1930년대 제 1차대전이 끝나고 세계적으로 제일 앞서나간다는 영국, 프랑스 시단
에서도 시가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때 오든이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시인이죠.
노벨상 탄 유명한 T.S 엘리엇보다 조금 뒷 사람인데요, 엘리엇이 어렵고 고전적이고 산업적
이고 관념적인 시를 쓸 때, 오든이란 사람은 '시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사는 사람속에
여러 사람의 정서와 사상을 그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했던 진보적인 시인이었죠.
그 시인이 그때도 시를 사람들이 안 읽으니까 재미있게 읽힐 만한 시만을 골라서 책을 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냐면 '옥스퍼드 북 오브 라이트 버스', 그러니까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시 모음
입니다. 오든이 그 책 한권을 내면서 한 얘기가 '사람들이 시를 안 읽는데 사회적인, 환경의
변화도 있지만 시인들 자신에게는 죄가 없는가 따져볼 때다. 사람들이 항상 긴장해서 사는 것은
아니니까 어렵게 접근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볍게 읽힐 수 있는 시를 가지고 접근해보자
'라고 했습니다.
시인들의 '자폐성', '소양 부족'이 시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
저도 문득 오늘날 라이트 버스라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발상도 해볼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얘기는 무엇이냐 하면 오늘 우리가 시를 안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사이버 영상매체의 등장으로 인한 매체의 다양화 등 사회환경의 변화도 있겠지만 그러나 다른
쪽에서 보면 근본적으로 시인 자신에게도 상당부분의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50년쯤 시를 써왔지만 제가 읽어도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시들이 너무 많아요.
어떤 시를 읽고 나면 처음에 한번 읽어보면 참 어렵다, 한번 더 읽으면 정신이 몽롱해집니다.
너무 어려워서요. 한번 더 읽으면 안동소주 한잔 먹고서 뺑뺑이 친 것 같아요. 더 모르겠어요.
그래서 해설을 읽어보죠. 해설은 좀 이해할 수 있게 썼겠지. 그러나 해설을 읽어보면 안동소주
먹고서 뺑뺑이 친 것을 뒷다리 걸어서 넘어뜨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읽기가 더 어려워져요.
결국 시를 너무 어렵게 쓴다는 것인데, 저는 시를 어렵게 쓰는데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난해시라는 것도 있으니까 우리가 무조건 난해시를 쓰면 안된다고 타박해서는
안되죠. 시인이 복잡한 심리과정이 있어서 도저히 어렵게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형편도
있겠죠. 예컨대 저는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만 이상 같은 시인이 그렇습니다.
이상 시인은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데 사실 거기에는 다 먹고사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상 같은 어려운 시들이 없으면 대학교수들이 학교에서 강의할 것이 없어져요.
이상 같은 사람이 자꾸 있어야죠.
잡담을 좀 하자면 이상은 시인이나 소설가라기 보다는 에세이스트입니다. 산문을 참 잘써요.
그 사람 산문은 우리나라 산문사상 가장 뛰어난 산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김수영 산문이
누구에게 뿌리가 있습니까. 김수영 산문은 본질적으로 뿌리를 이상에게 두고 있는 것이죠.
여하간 뛰어난 산문가이지만 시는 좀 아리까리하고 너무 어렵게 써서 무책임한 면이 있죠.
그래도 우리는 이상을 인정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상은 그러한 복잡한 표현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심리상태에 있었죠.
그러나 최근의 난해시라는 것은 그렇게 부득이하고 불가피한 성격이라기보다는 대체로 자폐성
이 있다는 것이예요. 자기 마음을 남들에게 열지 않는다는 거죠. 마음을 꽉 닫아놓고 '좋다,
너희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나대로 혼자 나갈꺼야' 하는 자폐성이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시를 정확하게 쓰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법 상에서, 재능
부족, 솜씨 부족이라는 거죠.
18세기에 워즈워스란 시인이 있습니다. 워즈워스라는 시인이 서정시집이라는 시집을 냈어요.
공동 시집에서 실명이 아니라 필명으로 낸 시집인데, 냈다가 반응이 좋으니까 30년 뒤에 재판을
했어요. 그 30년 동안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시인이란 무엇인가' 하는 자기 고민을 털어
놨어요. 시인이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이것저것 하다가 결론으로는 결국 '시인이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남과 똑같은 사람이다. 다만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남들보다 더 정확
하고 분명하게 자기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있는 능력,
정확하고 분명할 뿐 아니라 힘있고 단순화시켜 얘기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고 있는 사람'
이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우리 시하고 비교해서 얘기하자면 자기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을 정확
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시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되겠죠. 아마도 워즈워스의 이 결론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론이 없는 것 같아요. 일단 그것을
획득해야 하는데 요즘 시인들이 그것을 못하고 있다는 얘기죠.
엉뚱한 말을 좀 하겠습니다. 워즈워스 이전까지는 구어,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고살면서
쓰는 말, 장터에서 쓰는 말을 가지고 시를 쓰지 않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시는 문어로
이루어졌어요. 처음으로 그것을 깨고 민중어라고 할까, 생활어로 시를 쓰기 시작한 최초의
시인이 워즈워스입니다.
생각도 처음에는 진보적이었죠. 프랑스혁명 당시 그 사람 나이가 스물 셋인가 넷이었을 겁니다.
이 사람이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보니 파리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니까 파리로
쫓아갑니다.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파리 시민들이 어떻게 혁명을 성취해가는가를 감격스런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영국도 프랑스 같은 혁명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느날 문득 친척이 죽어서 막대한 유산을 받게 됐습니다. 부자가 되니까
우물우물 시를 게을리 했습니다. 온갖 힘을 다해서 시를 쓴다는 게 재미가 없으니까 공주가
시를 써달라 하면 써주고, 왕이 축시를 해달라고 하면 해주면서 보수화됩니다. 그러면서 영국
에서 화두가 됐던 모든 국민은 똑같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의무교육, 모든 여성도 똑같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여성교육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를 합니다.
반면 로버트 브라운이라는 영국시인이 있습니다. 워즈워스와는 40년 정도 차이가 나는 사람
인데, 이 사람은 워즈워스를 비판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평생을 워즈워스 비판하는 데 바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뭐라고 했냐 하면, '시인은 나이 들어서 시를 쓰면 안된다, 젊어서 쓰고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대상은 워즈워스였죠. 워즈워스는 젊을 때 쓴 시는 괜찮고, 39살
까지 쓴 시는 그래도 읽어줄만한데 마흔 넘어서 쓴 시는 화장실에서 찢어버려야 한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늙어서까지 시를 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여튼 시인이란 무엇인가를 얘기하다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요즘 우리 시가 어려운 까닭중에
하나는 바로 워즈워스가 정의하고 있는 시인의 능력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시인 중
에 너무 많아서 그렇다는 얘기가 되는거죠. 그러니까 정말 자기가 쓰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시를 어렵게 쓰는 경향이 생기는 겁니다.
결국 시인이 자폐증에 걸려서 시의 소통의 통로를 어렵게 만드는 것 하나와 시인 자신이
능력이 모자라서 자기의 말을 정확히 시로 형상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어려운 시 중에는 복잡한 세상을 살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어려운 시를 쓰는 경향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지금 얘기한 경향이 더 많다는 말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시 읽는 재미 하나, "시는 단 몇 마디로 힘있고 분명하게 하는 대화"
반대로 시를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어려운 시를 한번 더 읽어줄 수 있는 아량이 있는게 좋겠죠.
또 읽어서 모르겠으면 안 읽어도 좋습니다. 그 시집 그래도 5천원 들여서 산 책을 내버리기는
아까우니까 어디 한구석에 뒀다가 1년, 2년쯤 후에 읽어보는 것도 좋겠죠. 그래도 모르겠으면
재활용 하는 곳에 버리면 다른 종이로 탄생할 테니까 버려도 아까운게 없죠.
시가 무슨 일을 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가 자폐증으로
인한 독자와의 소통을 얘기했는데, 거꾸로 얘기하면 시도 다른 말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대화입
니다. 단 몇마디로 힘있고 분명하게 하는 대화죠. 어떻게 보면 짧은 말을 가지고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대화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짧은 말을 가지고 어떠한 웅변가가 얘기할 수
있는 것보다 힘있고 감동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대화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를 쓰고
읽으면 자폐증은 어느 정도 풀어지겠죠.
예를 들어볼까요. 김종삼 시인의 시가 얼핏 생각납니다. 묵화라는 시가 있습니다. 짧으니까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물먹는 소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오늘 하루도 함께 지냈다고
서로 발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이 시 어떻습니까. 저는 이 시를 읽을 적마다 살기 어려운 것, 노동의 힘든 것, 인간의 고독이
얼마나 사람을 못견디게 만드는가 하는 여러 가지를 몇십 매 몇백 매의 에세이나 웅변보다도
이 시 몇줄이 강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루종일 할머니와 소가 함께 일한거죠.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게 일했으면 소도 발등이 붓고
할머니도 발등이 부었겠습니까. 또 이것을 쓴 때가 1950년대로 알고 있는데 전쟁통에 가족을
다 잃고 혼자 외롭게 살고있는 할머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시에서 떠오르죠.
이 시는 몇마디 가지고 많은 웅변이나 몇백장이 되는 산문이 가지는 대화보다도 강력한 대화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결국 시라는 것도 대화라는 생각을 하면서 시를 읽으면 좀 더 시를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어려운 시보다는 서로 대화가
될 수 있는 시를 먼저 읽는게 시를 읽는 재미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제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만 추측컨대 이중섭이라는 화가의 '
소'라는 그림을 보고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김종삼 시인과 이중섭 화가는 친하지는
않았지만 김종삼 시인의 형과 이중섭 화가가 친했고 또 이중섭 화가가 그 무렵 시인들과 어울려
놀았다고 해요. 그래서 그 그림을 보고 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 시가 이중섭 화가의 그림보다 값어치가 나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이 시에는
이중섭 화가의 소 그림에는 없는 그림이 이 속에는 많이 있죠. 아무리 그림 잘 그린다 하더라도
발등이 부은 것을 그릴 수 있는 화가가 있습니까. 또 하루종일 일을 한 모습을 그대로 그려넣을
수 있는 화가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시를 읽을 때 한 개의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도 시를 읽는 재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국 시를 읽는 것은 시인과 서로 대화가 돼서 알아들을 때 재미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머릿속
에 선명한 그림 하나를 그려넣을 수 있을 때 시를 읽는 재미가 있다는 얘기죠.
시 읽는 재미 둘, "머릿속에 그림 한 폭 그려넣을 수 있는 시"
재미난 시라는 것은 어떠한 시라도 머릿속에 뚜렷한 그림 하나를 그리게 만들어 주는 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시를 한편 외운다면 그림을 한 폭 머릿속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효과가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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