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을 풍경 2019. 10. 13. 21:20

수필의 예술성과 과제

 

                                   金 宇 鍾

 

1.수필가의 이론

문학의 이론은 평론가가 남을 평가하고 따질 때나 써먹는 도구가 아니다. 문학에 대한 바른 이론은 좋은 창작을 위해서 문인이 이수해야 할 필수 과목이다. 그리고 문인으로서의 사회적 명예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이론은 필수다. 특히 수필가가 그렇다.

ㄱ. 신춘문예 응모에는 수필 부분이 없다.

ㄴ. 어느 시인이 수필은 문학이 아니라고 공중파 방송에서 말한 일도 있다.

ㄷ. 한국작가회(전 민족문학작가회)에서는 수필가를 받아주지도 않고 있다.

ㄹ . 국가의 문예창작 지원금에서는 수필집을 지원 대상에서 제외시켰던 일이 있다.

ㅁ . 내 서가에 있는 여러 명의 현대문학사 저서들(외국 것도 포함)은 수필은 빼 놓고 쓴 책들이다.

이런 것은 모두 홍판서의 몸종 춘섬에게서 태어난 홍길동처럼 수필은 적자가 아닌 서자로서 문학 족보에도 제대로 못 오르고 정당한 권리를 빼앗기는 경우가 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수필가들이 이에 대하여 다수가 보는 발표기구를 통해서 제대로 반론을 제기한 일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수필에 대한 이론이 없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자신 있는 이론이 없으니까 공식적 반론 제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다만 문예진흥원의 지원금 문제는 해결은 했지만 거물급 국회의원을 동원해서 해결한 것은 수필문학의 바른 이론을 통한 당당한 해결이 아니라 권력을 앞세운 인상이 짙어서 부끄럽다.

한국의 수필가가 누구나 갖춰야 야 할 이론은 그것이 당당한 문학 장르가 아닌 양 오해하는 경향에 대하여 ‘수필은 문학이다’ 또는 수필은 어떤 면에서 ‘가장 좋은 문학 장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론이다.

우리는 ‘한국문인협회’나 ‘수필과 비평사’ 회원명단에 있는 것만으로 당당한 수필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필문단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사태를 무력화시키고 시정하고 설득시킬 수필의 문학적 특성을 분명히 입증할 이론을 갖추고 있을 때만 당당히 이 사회의 수필가로서 명예와 권리를 지킬 수 있다.

 

2.문학의 정의(定義)와 상상력의 조건

‘수필은 문학이 아니다’라고?

이것은 참으로 황당한 말이지만 문예사전이나 국어사전에 써 놓은 ‘문학의 정의’를 바로 해석하지 않으면 이런 주장도 나오게 된다.

 

‘문학은 정서, 사상을 상상의 힘을 빌어서 언어, 문자로써 표현한 예술 및 작품이다.’

 

민중서림의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것을 간단히 줄이면 ‘문학은 언어, 상상, 사상과 정서, 예술의 결합체’라는 말이 된다.

사전마다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내용은 모두 이것이다. 이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문학이 아니다.

그리고 이 사전 설명에서 ‘예술’을 ‘아름다움’으로 바꾸고, ‘문자 또는 언어’를 ‘언어’ 한 단어로 묶으면 문학은 본질적으로 언어 상상 사상과 감정 그리고 아름다움의 네 가지 조건의 결합체라고 말하면 된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내려진 이런 문학의 정의는 시 수필 소설 평론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망라해서 내린 정의는 아니라고 간주된다.

문인은 예전부터 주로 시인을 지칭했다. 소설가는 그냥 이야기꾼이었으며 그 뒤에 문학이론서가 나올 때쯤에는 시와 소설과 희곡과 평론이 문학이고 수필은 문인 아닌 누구라도 쉽게 붓 나가는 대로 쓰면 그만인 일반 산문쯤으로 인식되었다. 수필(隨筆)이라는 용어의 한자 풀이 자체도 그렇게 붓나가는 대로 쉽게 따라 쓰면 되는 글이다.

문학은 예술이며 예술은 전문적 장인(匠人)의 영역이므로 이렇게 안이하게 쓰는 글은 예술로서의 문학 영역에 포함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평론가나 학자들은 지난날의 전통적인 개념에 속해 있던 수필들은 문학사 저서에서도 빼버리고 문학의 정의도 수필은 염두에 두지 않고 말했던 것 같다.

나는 많은 수필가가 모인 자리에서 수필에 관한 강의를 마치자 한 사람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수필을 꼭 그렇게 써야 됩니까? 그냥 써지는 대로 쓰면 안 되나요?’

이렇게 반문한 수필가는 정년 퇴직을 앞둔 중년이었으며 그도 수필은 시나 소설과 달리 그냥 쉽게 써지는 대로 쓰기만 하면 되는 문학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렇게 부담 없이 쉽게 쓰는 문학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문학을 엄격하게 전문적 장인의 영역으로 보자면 그는 문인으로서의 충분조건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다.

이렇게 수필이 문학론에서 사생아인양 밀려나기 쉬운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상상의 부재(想像의 不在)’ 라는 형식적 조건 때문이다.

문학의 정의에는 분명히 ‘상상의 힘을 빌어서’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그런데 수필은 상상적 기법 없이 쓰는 경우가 많다. 수필은 다양한 형태로서 상상이 필요 없는 경우도 많지만 예술성을 위해서 그것이 매우 필요하다는 것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필을 다른 장르와 비교하면 이렇다.

소설은 논픽션이 아닌 이상 상상이 절대적 조건이다. 소설은 허구이며 허구는 상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필은 허구를 용납하지 않으니까 상상의 힘을 빌어가며 쓰면 안 되는 것처럼 오해하기 쉽다.

또 시는 소설과 달리 사실을 표현하는 부분도 있지만 좋은 시는 상상의 세계가 중심이 되고 생명이 된다. 시적 창작기법의 핵심이 되는 이미지의 세계는 상상의 세계다.

이와 달리 수필은 실제적 경험적 사실을 거짓없이 솔직하게 쓰는 것이 강조되고 이것이 작품의 중심이 되어 왔으며 이미지의 세계는 별로 없기 때문에 상상의 힘을 빌어서 쓰는 문학이 아니라고 인식되기 쉽다.

그렇다면 ‘문학의 정의’대로만 따지면 ‘수필은 문학이 아니다’ 라는 말도 나오게 된다. 문학의 정의에는 반드시 ‘상상의 힘을 빌어서’라는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과거의 전통적인 수필은 ‘상상의 힘을 빌어서’ 쓰지 않은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좀더 근원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문학은 왜 상상 조건이 필수냐 하는 질문이다. 김치를 담그는 양념에는 고추가 필수라지만 나는 고추 가루가 없어서 고추 없는 백김치를 담가 봤는데 그것도 의외로 맛이 있었다. 그러므로 상상의 세계가 없는 수필도 그 나름대로 훌륭한 문학이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치는 역시 고춧가루가 있어야 더 좋듯이 문학의 예술성을 위해서는 역시 상상의 세계가 필수다. 문학이 감동을 증폭시킬 수 있는 가장 큰 기법은 상상적 기법이 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과거의 전통적 수필을 더 높은 차원으로 진화시킬 수 있는 현대수필의 과제다.

 

3.상상의 세계와 예술성

특별한 기법이 없어도 누구나 창작 과정에서는 상상력을 작동시킨다. 낮에 만난 친구를 생각하며 쓰는 것도 상상이다. 그러나 문학에서 말하는 상상의 세계는 이것이 아니다. 낮에 만난 친구를 생각하며 쓰는 것은 문학의 정의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 ‘상상의 힘을 빌어서’에 해당되지 않는다. ‘힘을 빌어서’라는 ‘의도적인 힘들임’의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의 그것은 작자가 창의적으로 힘들여서 만들어내는 상상의 세계를 말한다. 그리고 작품 속의 상상의 세계는 작자만 힘을 들여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독자도 힘들여서 도달하는 상상의 세계를 말한다. 즉 작가가 본관념의 간접적 표현을 위해서 보조관념을 설정해 놓았다면 다음에는 독자가 보조관념을 통해서 본관념에 도달하는 상상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4.시와 상상 세계 (김광균의 <설야>)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야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女人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의 <설야>에는 ‘먼 곳의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있다. 이것은 ‘깊은 밤 눈 내리는 소리’를 대신해서 말해주는 감각적 이미지다. 이것은 흘러가 버린 과거에 대한 서글픈 그리움을 표현하며 감동을 증폭시켜 나가는 우수한 효과가 있다.

이런 상상의 세계는 낮에 만난 친구 얘기를 쉽게 일기장에 쓰며 상상한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상상의 힘을 빌어서’라는 의도적 힘들임의 과정이 있으며, 김광균만 할 수 있었던 상상의 세계이기 때문에 창작물로서의 저작권을 지니는 상상의 세계다. 이 시는 이런 상상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감동적이며, 예술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 소재를 그대로 수필로 옮기면 상상이 아닌 실제 얘기가 된다. 수필가가 눈내리는 밤 이야기를 쓰다가 특별한 다른 장치 없이 그대로 이런 여인의 탈의 장면으로 이어진 글이라면 그것은 김광균이 실제로 눈 내리는 밤에 산책 나와서 어느 집 봉창에 귀를 대고 몰래 별난 짓을 한 글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옷 벗는 소리’가 수필 소재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상상적 이미지의 세계는 시의 전유물이 아니며 기법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설야>는 사실과 상상의 세계가 교차하고 있다. 한 밤에 소리없이 흩날리는 눈은 사실의 세계다. 그리고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은 상상의 세계다.

이 표현은 이렇게 사실과 상상의 세계가 하나가 되기 때문에 평면적 단순성을 벗어나서 입체적 효과를 지니며 내용에 깊이가 형성될 뿐안 아니라 그 기발한 에로티시즘 때문에 감동이 증폭된다. 그만큼 예술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여기서 입체적 효과라는 것은 독자가 흰 눈의 영상만 보는 것이 아니고 흰 눈과 함께 여기에 겹쳐진 ‘서글픈 옛 자취’를 함께 보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맑은 호수의 표면을 보면서도 그 밑바닥의 자갈과 물고기들을 함께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것은 입체적인 그림이며 깊이가 있는 그림이고 그만큼 내용이 풍성한 그림이기 때문에 더 감동적이다. 이것이 상상적 기법이 창출해 내는 예술성이다.

수사법으로 보면 이것은 비유법중의 하나인 직유법이다. 소리 없이 눈이 흩날리는 소리를 그렇게 다른 사물에 비유한 것이기에 비유법이고 비유 대상이 밝혀진 형태이기 때문에 직유법이다.

다음의 ‘야위어 가는 호롱불’과 ‘서글픈 옛 자취’도 전자는 사실의 세계이고 후자는 상상의 세계로서 서로 직유법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런데 시의 감동적 효과는 직유보다는 은유에서 더 많이 나타나며 김광균은 물론이고 다른 우수작들은 대개 은유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더 많다.

 

5.수필과 상상 세계( 피천득의 <인연>)

피천득의 <인연>은 이런 의미에서 일반적인 다른 수필과 달리 은유법으로 예술성을 높인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수필에서 작자가 성심여자 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한 부분은 작자가 세 번 만나고 헤어졌던 아사코를 그리워 하고 있다는 의미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또 세 번째 만났을 때 이미 결혼해 버린 아사코가 뾰죽 지붕 뾰죽 창문 집에 살더라는 표현은 그녀가 다른 남자와 살고 있으면서도 작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작자가 어린 아사코에게 안데르센 동화집을 줬을 때 그녀가 표지화의 뾰죽지붕 뾰죽 창문을 보고 장차 그런 집에서 둘이 살자고 말했기 때문이다.

또 성숙해진 아사코를 만났을 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을 함께 얘기했다는 표현은 두 사람의 만남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지니게 된 슬픔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이미지가 된다.

또 아사코에 대하여 스위트피와 목련과 시들어가는 백합을 말한 것도 각각 그 꽃의 이미지를 통해서 아사코의 3단계의 성장 변화 과정을 비유한 은유법이며 이밖에도 몇 가지 더 은유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 수필은 물론 누구나 좋아하기 쉬운 러브스토리이기 때문에 재미 있기도 하지만 이런 은유법 때문에 예술적 감동 효과를 크게 거둔 작품이다.

다만 윤오영이 <수필문학 입문>에서 피천득의 <장미>를 ‘너무 작위적’이라고 했듯이 <인연>도 작위적인 성격이 짙으며, 수필이 아니라 소설이라고 직접 고백했다는 증언도 있어서 흠이 되고 있지만 수필에서도 감동적 예술성이 상상의 힘을 빌어서 만드는 은유법에 있음을 입증한 것은 사실이다.

 

<그 겨울의 날개>와 <그 여름 베짱이의 마지막 연주>

수필 <그 겨울의 날개>에는 두 가지의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유신독재치하에서 투옥되고 해직되고 다시 출옥 후에 수필집이 판매금지 된 작자(필자)의 이야기가 아주 조금 언급된 부분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필자가 어린 시절에 발견했던 곤충의 번데기 얘기가 있다. 번데기는 겨울 산에서 발견 되어 필자의 작은 종이 상자 속에 갇혀 있다가 그 속에서 나비로 우화했지만 한 번도 날아 보지 못하고 몸부림만 치다가 날개가 다 떨어져 죽어버린 주인공이다.

이 두 가지 소재는 상상이 아니라 모두 사실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수필은 날개가 다 떨어져 버린 채로 죽은 번데기의 이야기를 훗날 해직 교수가 되고 글도 쓰기 어렵게 되었던 자신의 이미지로 쓴 것이다. 그리고 어린 딸에게 해 주는 말 한마디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그 사건과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표현한 은유법이다.

<그 여름 베짱이의 날개>라는 수필도 필자로서는 사실의 실제적 경험을 쓴 것이며 그렇게 허구 아닌 사실을 쓰면서 이를 통해서 당대의 정치적 현실을 말하고 필자 자신을 말한 것이다.

 

6. 그러나 주제가 우선이다.

프랑스의 가스똥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는 이런 은유적 표현이 가장 감동적인 예술적 기법임을 명확하게 지적한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물 불 흙 공기의 4원소론등으로 ‘이미지의 현상학’을 논하던 그는 이미지에 의한 상상의 세계에 도달했을 때의 감동을 ‘혼의 울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예술의 본질이 아름다움이라면 그 아름다움을 우리는 어디서 구할 것인가에 대한 가장 명백한 답을 그는 여기서 지적한 것이다.

앞의 예로 보자. 고치 속에 갇혀 있던 애벌레가 마침내 창공을 훨훨 나는 꿈을 갖고 나비로 태어났지만 그곳은 비좁고 캄캄한 종이상자 속이었으며, 나비는 그 속에서 몸부림만 치다가 날개가 다 부서진 채로 죽어 버렸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제대로 써나간다면 독자는 이 부분에서 나비가 곧 작자 자신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군사독재하에서 좋은 세상을 바라다가 고통을 겪던 한 투옥 작가의 이야기임을 문득 알게 되면서 이 때의 감동(혼의 울림)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바슐라르의 주장이다.

그는 은유법이라는 수사법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지에 의한 상상의 세계는 곧 은유법으로 풀이되는 세계다. 그리고 이것은 미적 감동을 위한 수사법 중 가장 큰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법이 현대 한국 수필을 더 높은 단계로 상승시킬 중요한 방향이지만 더 근원적인 과제는 이런 기법보다도 기법이 담아야 할 내용에 있다.

주제가 바르지 않으면 기법이 우수할수록 더 나쁜 문학이 된다. 잘 드는 칼일수록 더 잔인한살인도구가 되는 것과 같다. 중국 난징 학살 때 두 일본 장교가 일본도로 백인의 목 자르기 내기한 것은 명도(名刀) 사용의 기법의 우수성 경쟁이었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것은 기법이 아니라 정신이다. 아무리 서투른 문장이라도 주제가 아름다우면 그 기교적 미숙성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다.

우수한 기법이 오용된 예를 보자.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한 편의 작품을 구성하는 많은 단어 하나하나는 전체적 유기체의 일부분이다. 이 시도 전체 속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어느 특정인의 이야기로 유추될 수 있다.

지난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런 인물을 만난 일이 있다. 그는 꼭 30세 때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꼭 40세 때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44세 때 항복하고 전쟁 터에서 돌아왔다.

남의 나라를 뺏고 빼앗기고 망하기도 하는 전쟁은 뜨거운 연애 사건과도 비슷하다. 이 시에서처럼 전쟁 도발자는 아쉬움에 가슴 조일 때가 있다. 승리를 거듭하다가 패하면 한 때 기고만장하던 시절과 그 찬란했던 영광에 대해서는 그리움이 남기도 한다. 우리가 겪은 지난날의 역사 속에서 그 인물은 한창 젊을 때 전쟁을 일으키다 망했다. 30세와 40세에 전쟁 도발하고 44세에 망하고 돌아왔으니까 이것은 머언 먼 젊은 날의 러브스토리 같다.

그 러브 스토리는 ‘젊음의 뒤안길’에서 일어났던 일로 비유되기도 한다. 무서운 죽음의 전쟁터였으니까 밝은 대로가 아니라 젊은 날의 컴컴한 뒤안길이라고 해야 알맞다. 그는 그렇게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것이다.

여기에는 ‘거울 앞에 선 누님’이 있고 또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이 생긴 꽃’도 있다.

꽃이 남자의 비유라면 이 두 인물은 모두 거울 앞에 서 있다. 그리고 실제적 사실이 그렇다.

그들의 나라에는 거울 앞에 서 있는 여자 그림이 있고 조각이 있고 만화가 있고 또 붉은 햇살무늬도 있다. 햇살 16개는 그 나라 국기의 햇살 16개와 꼭 일치한다.

이 여자만이 아니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 온 그 남자도 거울 앞에 몇차례 섰었다. 결혼 전에도 몇차례 그랬다고 기록에 남아 있고, 시에서처럼 패망 후에야말로 당연히 ‘인제는 돌아 와 거울 앞에’ 서서 합장하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 시는 이런 역사적 사건의 이미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기법을 지닌다. 4연까지 전체가 그렇다. 그런데 이런 탁월한 기법으로 담아낸 주제는 무엇일까?

주제가 나쁘면 좋은 기법은 나쁜 것을 더 잘 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법도 좋아야 하지만 그보다 우선하는 것이 주제이며 한국수필은 이 두 가지 문제를 다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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