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을 풍경 2019. 3. 14. 22:07

한 잔의 붉은 거울


                     김혜순

 

네 꿈을 꾸고 나면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

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건거리며 오고

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이 길에선 따뜻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에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

저 번개는 네 머릿속에 있어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다 온몸을 떠는 나를 내가 본다

어디선가 관자놀이를 치는 망치 소리

밤거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독의 총소리

이제 나는 더 이상 숨 쉴 곳조차 없구나

 

나는 붉은 잔을 응시한다 고요한 표면

나는 그 붉은 거울을 들어 마신다

몸속에서 붉게 흐르는 거울들이 소리친다

너는 주점을 나와 비틀비틀 저 멀리로 사라지지만

그 먼 곳이 내게는 가장 가까운 곳

내 안에는 너로부터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