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을 풍경 2018. 12. 29. 21:50

나의 희망 - 안도현

 

학교 관사 옆 공터가 심심하지 않게
거기에다 호박을 심자 했더니
선생님,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심나요?
깔깔대더니

어느새 호미와 삽과 괭이가 모이고,
비료가 한줌씩 오고,
쇠똥거름도 한 리어카 달려왔지.
사실 이런 일이 생전 처음인 나는
구덩이마다 호박씨 서너 개씩을 꼭꼭 심으며
이것들이 땅 속에서 부디 숨결을 열어 주기를
그리하여 이 세상하고 다시 관계를 맺어 주기를
얼마나 조마조마 기다렸는지 몰라.

떡잎이 삼삼오오 오종종 돋은 날
나는 고것들이 햇볕의 끈을 부디 놓치지 않기를
빌었지, 덩굴손을 가지게 되면
자기 아닌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손 뻗어 툭, 건드려 보는 재미로 살아가기를
수업 없는 빈 시간에 둘러보고 물을 주며
또 빌고는 했지.

사는 게 뭐 별거 있겠어.
자꾸 물을 주다 보면
호박꽃은 필 거야.
그러면 어느 날 아침 한때
나, 호박꽃 주위에서 붕붕거리는 한 마리 벌이 될지도 몰라.
세상 속으로 뚫린 귀가 있다면
두두둥 둥둥둥 두둥두 둥둥두둥
호박이 익어 가는 소리도 들을 거야.
그래 그래, 삶의 뜨거운 날 다 지나간 뒤에
우리 반 여학생들 궁뎅이 같은 놈이나
드문드문 열렸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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