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을 풍경 2017. 7. 21. 15:51

빨래

/ 도종환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내려와 머물던
비구름이 몸을 풀어 올라갔다가는 다시
산허리를 감싸 안고 낮게 내려오길 이레 째
선방 뒤를 돌아 개울물이 소리치며 흘러간다
먹물 묻은 손을 씻어 낸 뒤
옷가지를 물에 담가 헹군다
동백꽃 붉은 꽃송이가 머리 째 툭 떨어진다
아직 고운 자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꽃이
땟물과 섞여 떠내려간다
내가 지은 업이 물에 씻겨 가길 바라며
비누칠을 하다가 아름답던 날들까지도
흘려보내야 함을 안다
선업도 업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 안에 자만과 욕심과 허영의 얼굴이
섞여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속옷을 빨아 다시 향기롭기를 바라기보다
선업도 악업도 햇빛에 다 날아간 뒤
그저 물 마른 냄새만 남길 바란다
다만 지워지고 씻기어 텅 빈 우주의 흔적이
거기 와 머문다면 좋겠다
나마저도 씻겨 내려가
마음자리에 허공만 남는다면
고요히 비어 있는 충만 가운데
바람소리 물소리 소리 없이 스민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