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국왕들의 재미있는 일화들
조선 국왕들의 재미있는 일화들
태종
1.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 헛발질한 것도 적었다.
태종이 그건 제발 지워달라, 창피하다 애원까지 했는데도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라고 적었다.
2. 하도 사관이 쫓아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사관이 거기까지 말 타고 쫓아와 사냥기록을 적었다고 한다.
3. 태종은 아들 양녕대군이 너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자 속이 상해
밤새 울어 목이 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는
아버지인 양녕대군보다 더 많은 사고를 쳐 양녕대군의 속을 썩혔고
결국 왕자의 아들의 직위인 '군'의 작위가 깎여
서산군에서 서산윤으로 강등당했다.
결국 이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자살시도를 하였고
이틀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혜는 사람을 때려 죽이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남의 첩을 빼앗기도 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하였고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
놀이 중 사람이 죽어나가게 하기도 하였다.
실록에서는 이혜가 망가진 원인을 사랑했던 첩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난 후에 울화병이 생겨 이리 되었다고 한다.)
세종
1. 세종대왕은 좋아하던 후궁에게 신하들 몰래 따로 불러서
말없이 귤 하나를 쑥~ 내밀어준 얘기도 있다.
(그 당시 귤이 귀한 것이었다.)
2. 친경한다고, 소 끌고 밭 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배고픔을 못 견뎌,
밭 갈던 소를 때려잡아서 국 끓여 먹은 적도...
3. 명재상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철저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4.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
5.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격인 새벽 4시 상참에서부터 과업 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하였다.
밤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 독촉하고 소위 '갈궈대는' 바람에
모친 3년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려 했으나,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 더 시켰다.
6.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 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 곳 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으나, 그가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다.
양녕은 그날로 동침하고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 사람의 베게를 들여다 보진 못할 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 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세종이 기생에게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유유히 서울로 돌아와 세종을 알현하였다.
세종 :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지요?
양녕 : 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 없습니다.
세종 :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세종은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댁에 보냈다.
7.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이었다.
태종은 특별히 세종에게는 삼시 세끼 고기를 챙겨먹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충녕(세종)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종
1.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운장과 같은 풍모를 냈었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한 장 나왔다.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하여 신하들은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사람만은 수염이 길다는 말만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어진을 조사하다가 보니 어진 구석에 문종대왕의 어진이라는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2. 학식, 외모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건강
세조